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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日間の記錄

Windi Wander

  하나.
  ―4시와 5시 사이, 창문으로 빛이 쏟아질 때 바닥에 이는 일렁임이 좋았다. 뒤늦게 들어오는 빛은 하루를 다 비추고 남은, 하루 치의 잉여분의 빛이었다. 태양이 스러지기 전 빛의 부스러기들.

  재민은 그 새벽에 글이 가장 잘 써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오전을 앞에 달고 4와 5를 끌고 오면 그것은 꼭, 아주 부지런한 것처럼 느껴진다. 거개의 사람들은 6시, 7시나 돼서야 기상하고 하루를 맞이했으니 그보다 한두 시간 이른 새벽은 머잖아 여명을 맞이하기 직전 침묵의 성질을 띤 소란이었던 것이다.

  새벽은 조용하다. 팔월 하루 내도록 돌아가는 선풍기만이 유일한 고요를 꿰뚫었다. 누진세가 물리는 것을 완벽히 감당할 수 없으므로 드물게 켜 보는 에어컨은 피크 타임을 훌쩍 지난 저녁 여섯 시쯤 되어서야 찬 기운을 뱉으며 작동했다. 여름은 늘 이런 식이다. 특히 휴가철이 겹쳐 늘어지기만 하는 그 달은 더욱 그랬다. 여름에 태어난 우리는 어린 몸뚱어리 두 개로 선풍기 하나, 에어컨 하나면 족할 청춘을 한껏 덥혔다. 끄나풀 잡히는 족족 몸을 뒤섞었고, 얽히고설킨 혀와 손길을 기꺼이 받아내었고, 가끔은 소리 높인 고함에 순응했다. 다툼은 오래 가지 않았다. 한창때 우리는 눈만 맞으면 붙어먹기 바빴던 것도 같으니까. 그건 사랑이었고, 우리는 곧잘 그런 식으로 일곱 해의 팔월을 떠나보냈다.

  열다섯과 열여섯. 재민은 여전히 민형과의 첫 만남을 또렷이 기억했다. 힙합에 연고가 없어 동아리에는 가입하지 않았지만 행사 때마다 무대에 오르는 게 멋있던 사람임을 상기시켰다. 몇 차례고 반복했다. 옛 연인을 떠올리는 것은 가슴 아프다던데 어째 이민형만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헤어져 버린 연인이라는 사실을 분명 기저에 깔아 두고 생각하는데, 그럴 때마다 심장은 부풀어 올라 곧이라도 터질 것처럼 뛰었으니. 예상과 대개와 같이 좀 몸집이 크고 속이 비어 있는 단어들은 이민형을 수식하지 못했다. 그는 언제나 재민이 생각해 놓은 반경의 반구에서 꼭 한 발자국 벗어나 있었기 때문이다. 재민의 씀씀이가 커져 그 반경을 넓힐 때마다 이민형은 그걸 또 어떻게 알았는지 역시 항상 한 발짝, 그 직전, 바깥에 서 있었다.

  ―고개를 들면 창밖으로 하루가 스러지는 풍경. …나는 기울어지는 것들만 골라서 사랑하는 유별한 취미가 있고, 그것은 천성이나 성격과 관계된 일일지도 모르겠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울어지는 모든 것들의 목뒤에, 입술을 대고 싶어진다.

  이민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하루는, 숫자 개념으로는 지구가 멸망하기 전까지 번복이 가능하지만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회성 삶을 살아가는 우리는, 여명보다 황혼을 관찰하기가 더 쉬웠던 고등학생인 우리는 어쩌다 보니 사랑했었고. 해가 기울고 달이 차오르는 풍경은, 하늘빛 천 조각 위를 주홍빛 계열인 천이 덮어내고, 또 그것을, 먹을 한껏 머금은 듯이 짙기만 한 검은 천으로 지워내는 시간들의 반복을 버텼던 우리는, 그러니까, 사랑을 했다. 하루가 스러지고 한 해가 스러지고 하는 걸 질리도록 밟아 오다가 결국 일곱 해째 크리스마스가 스러지는 풍경의 날, 유독 밤이 일찍 찾아오는 겨울밤, 사귐과 이별이 가장 성할 그때에. 이민형과 나재민은 사귐 대신 이별을 택했다. 그러나 이별을 고한 이민형조차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한 눈 내리는 밤이 그날의 기억으로 노이즈 하나 없이 깔끔하게 남아 있다.

  ―내가 인디언이라면 12월을 '머뭇거리며, 돌아가는 달'이라고 부를 텐데.


  둘.
  로맨스 영화의 결말 대부분은 두 주연이 이어지는 방향으로 나 있다. 청춘 로맨스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운동하다 땀에 젖은 남자 주인공과 금방까지 실내에 있던 여자 주인공이 밖을 나와 둘이 처음 만나고, 조금 절륜한 로맨스는 술집에서든 회사에서든 어쨌든 어딘가에서 만나게 되어 서서히 눈이 맞아 들어가는 그런 진부한 내용들이 80퍼센트는 차지하고 있을 거다. 민형은 한국 드라마는 막장이 많아서 꺼려졌고, 한국 영화는 스토리가 다 비슷비슷해서 보길 꺼렸다. 비슷한 게 무난하고 좋다고들 하는데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깎아지는 자존감은 비교하는 사람도 비교되는 사람도 아닌 비교 당하고 있는 당사자다.

  A 양이 연예인 C 양을 닮았다는 그런 얘기를 주변에서 자주 들을 때, 처음은 저가 유명 연예인을 닮았다는 사실이 기꺼울 것이고, 그게 적당할 때가 되면 스스로가 예쁜 것을 실감하게 되는 거고, 가는 곳마다 그런 소릴 듣고 다니면 차라리 자신이 먼저 연예계로 데뷔했으면 그 C 양이 자신의 닮은꼴이 되는 거 아닌가 하며 이전 삶에 조금 아쉬움을 느끼게 되는 과정이 발생한다. 이민형은 그런 게 싫었다. 누굴 닮았다느니 하는 뻔한 칭찬은 괜한 기대를 심어주는 동시에 과거를 의심하게 만들고 자책하게 만든다.

  과거를 의심하는 것은 끔찍하지. 민형의 입버릇 비슷한 거였다. 힙합 동아리에서 붙여 준 20세기 마지막 스웩이라는 우스운 별명으로 미래에 후회하지 않을 수 있냐. 누가 그렇게 물으면 이민형은 Yes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야 그것이 민형 자신을 호명하는 일부가 되었으니 그건 언제고 추억으로 묻어 둬도 나쁠 게 없다. 그런데도 넌 뭐 그리 삶이 쉽냐. 나중일 모른다. 열여덟 열아홉엔 그 누구보다 활달했던 애들이 나이 한둘씩 늘어갈수록 사람이 변했다. 절친 현수가 스물둘에 그렇게 좋아 죽던 미술 하던 걸 접고 공무원 시험이나 보겠다는 것이 가장 충격이었다. 현수, 네 그림은 매력 있어. 더 잘하는 애들이 천지에 널렸어. 민형은 그때 침묵을 지켰다.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비어 있다는 공허, 순식간에 사람을 좀먹은 두려움이 벼랑 끝으로 몬 현수의 인생을, 제 입을 빌어 왈가왈부해 봤자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스물둘에 알았다. 너무 늦게도 알았다. 그렇게나 당연한 것을 아는 주제에 정말 당연한 건 모르는 사람인지.

  그런데 그게 두려우면 아무것도 못 해. 나는 내가 나재민을 영원히 사랑할 거라고 생각 안 하니까. 그래도, 내 선택을 후회할 일은 전혀 없을 거라고 생각해. 현수야, 좋아하는 마음으로 순위권에 들 수는 없지. 혹여나 애정이 측정 기준이 된다고 해도 세상에 너보다 미술 사랑하는 애가 없을 리 있니. 그래도 네가 사랑해 온 시절은 영원히 간직되는 거 알잖아. 물론 어디 있다 장담할 수는 없는데 어딘가에 있어서 떠올리려 할 때면 생각나는. 내가 여름에 태어나 여름을 사랑해 버렸지만 그게 언제 사라져도 이상할 거 없는 하루야. 사라지면 나에겐 겨울이 남겠지. 한국의 겨울은 춥더라. 캐나다보다 여름이 훨씬 더워서 더욱 그렇게 느껴질 뿐인 거지. 느낌이란 그렇잖아, 그냥 말 그대로 느낌인 거라고. 그래서 나는 현재 여름 같은 삶을 지독하게 사랑하는 느낌만을 끌어안은 채 살고 있어. 11월 4일, 이민형이 박현수에게.

  ―이미 흘러가버린 날들은 어디에 머무는 걸까? 몸을 부풀리던 봄도, 시끄럽게 울어대던 여름도, 살아 있는 건 모든 뚝뚝 떨어지게 하던 가을도 사라지고 없다.
겨울은 춥고, 높고, 길다.

  여름의 낭만과 나재민을 잃은 12월 25일 겨울. 그해 크리스마스 날밤은 유독 길었고, 옆집 연인의 신음성이 평소보다 높았으며, 집은 보일러를 돌리지 않아 싸늘했다.


  셋.
  옆집 사는 사람이 짐을 뺐다. 재민은 하교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건물 앞에 이사차가 머물러 있기에 누군가 이 곳을 떠나구나 싶었는데 그게 옆집인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면 엘리베이터 벽면에 며칠 전부터 까만 글씨가 점처럼 박힌 흰 종이가 붙어 있었는데 아마 그것이 이사하는 동안의 소란을 염려해 미리 주민에게 알려 주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뒤늦은 때서야 깨닫고 수긍하는 건 익숙하다. 저번에 옆 동에 살던 친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사를 가 놓고 거기서 일주일을 살고서야 제 생각이 났다는 듯 연락이 왔을 때도 그랬다. 연락이 늦어 미안. 나 이사 갔어. 응, 그런 것 같더라. 잘 지내고 있어? 친구들이 모두 친절해. 잘됐다. 시간 날 때 연락할게.
  과한 진실은 묻지 않는 편이 좋다. 서로에게 상처가 안 되니까, 그건. 음, 진실이 과할 리가 있겠냐만은.

  사람이 살 때도 살지 않을 때도 워낙에 존재감 없이 굴던 옆집이 다시 채워졌다. 약 이 주 정도 뒤에 재민은 전과는 다른 이사차를 봤다. 이번에는 짐이 빠져들고 있었다. 고개를 꺾어 사다리가 닿은 곳을 보면 꼭 자기 옆집에 걸쳐져 있다. 사실 집은 외로운데 쓸쓸하지는 않다. 뽑기에서 뽑은 인형도 많았고 책도 많았다. 서랍을 뒤지면 게임 DVD도 많았고 영화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외롭다고 느끼는 건 인간은 교감하기 때문이다. 손길이 필요하고 다정한 말이 필요하고 인생이 필요하다. 네가 내 인생이 되어 줬으면 좋겠어. 인생의 동반자도 괜찮고 인생의 일부여도 좋다. 심지어는 인생의 오점으로 남겨져도 괜찮을 까닭은 그래도 한때 함께했는데, 그 추억 모두가 짙은 나락에 머물러 마땅한 것일까 싶어서.

  착각은 늘 그런 식이다.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든 것이 그쪽에 맞춰진다. 톱니바퀴는 엇나가기도 하고 맞지 않으면 걸려 멈춰 버리지만 이건 아니었다. 멈추지 않는다. 나는, 너는, 우리는 생각보다 이기적이라 모든 정보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변환시킨 다음에 출력하지. 재주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오해는 이런 특성에서 비롯되고 다툼은 오해에서 파생되고 이별은 다툼의 또 다른 말이다. 그런데 또 하나 더 말을 하자면 이게 정통일 뿐이지 다른 이별도 많음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것도.

  재민은 열다섯 남자아이가 남녀 합반인 반에서 조금 조용하고 선생님의 신임을 받는 평범한 축에 속한다. 피시방을 가기는 하지만 즐기지 않아 가방끈을 움켜쥐고 집으로 일찍 귀가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옆집이 비고 차는 걸 쉽사리 볼 수가 있었다. 학원은 주말에 갔다. 평일은 자습 시간을 내어 준다.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거니와 학원까지 가려고 버스를 타는 게 비효율적인 탓에 집에 틀어박혀 영화 한 편을 감상했다. 어제는 레옹을 봤다. 여자애들이 거기 나오는 여주가 정말 예쁘다길래.


  넷.
  ―사랑하는 자는 무릎을 꿇는 자가 아니라, 무릎이 꺾이는 자다.

  기꺼이, 라는 단어 하나를 반점 뒤에 넣어줄 수만 있다면.


  다섯.
  열여섯이 열다섯을 보는 것과 달리 열일곱이 열여섯을 볼 때면 왜 그런 어색한 기분이 드는 걸까. 한 살 차이라는 사실은 여전히 동일하고, 생일이 같은 8월에 놓여 있다는 것 역시 똑같은데 교복과 학교가 달라졌다는 것만으로 사람을 대하는 느낌 자체가 변한다. 돌연 이민형이 나재민을 애 취급한 것처럼. 민형은 열여섯에 이사했다. 그곳은 만족스러웠고, 그중에서 옆집 살던 열다섯 남자애가 가장 좋았다. 애착이 간다. 귀여운데 야무져서 덤벙거리는 민형을 챙겨 주던 한 살 어린 동생, 나재민. 나재민은 웃는 게 예뻤다. 정작 걘 민형더러 웃는 게 매력적이라고 하지만.

  캐나다 살다 한국으로 넘어오게 된 민형이 오래 머무른 이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신기했던 사람도, 귀여웠던, 친근했던, 좋아하게 된 사람은 모두 같은 나재민 이름을 가진 한 사람이었다. 단 한 사람. 왜 '단'이라는 글자 하나는 널 특별하게만 만들어 버리는가.

  민형이 힙합 동아리에 든 것은 순전히 자신의 음악 취향이 그쪽으로 나 있었기 때문이다. 저 본토에 살 적부터 랩이 가장 좋았고, 힙합 리듬이 좋았고. 그러니까 여러 권유들 무르고 그 망해 가던 동아릴 택했지. 가려던 고등학교엔 힙합 하는 동아리가 있었으나 무대에 나서 본전 뽑지는 못했다. 그 학교는 밴드가 유명했다. 그래도 거길 가길 선택했다. 민형이 사는 곳에서 학교 가까운 데가 하나기도 했고 그 비루한 모임을 선망의 대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민형 스스로도 알고 있었으니 그건 나쁘지 않은 도박이었다. 진작에 음악에 일가견 있는 걸 알았다. 비트 뽑는 것도 그렇고 프리스타일을 시켜도 막히지 않고 잘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좀 슬픈 얘기인데, 인생이란 레이스에 선 이상 타고난 놈을 이겨내기 힘들다.

  재민은 제 졸업식에 찾아온 민형을 향해 겨울 감기에 앓느라 발간 볼까지 말아 숨겨 올린 목도리 위로 빼꼼 드러난 동그란 눈을 잔뜩 휘어가며 웃었다. 민형이 건넨 꽃다발엔 재민이 좋아하는 안개꽃이 색색별로 뭉쳐 있었다. 그 묘한 색들을 섞어만 놓으면 그것대로 애꿎을 정도로 어지러울 테지. 눈에 예쁘게 들 것도 아녔고. 애초에 민형은 복잡한 것을 싫어한다. 그것은 언제까지고 사고하는 것부터 일어나는 일 모두를 꼬이게 하므로. 재민은 언젠가부터 민형의 집에 아무렇지 않게 비밀번호를 뚫고 잘 드나들었는데, 그 횟수가 해가 지나 둘 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상태가 되자 눈에 띄게 줄었다. 민형 역시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갈빛 진하게 머금은 동그란 뒤통술 기다리며 초반에야 안 오냐 형 심심해 하는 말로 불렀지 한두 달 지나자 그것도 뜸해졌다. 원래 관계라는 거 이렇게 가벼운가. 민형은 한결같이 자신에게 친근하게 굴던 재민을 떠올리며 며칠을 고심했다. 결국 내린 답은 그래도 모르겠다, 따위의 실속도 뭣도 없다는 것의 붕 떠 버린 기억. 재민은 민형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였다. 너무 멀어진 것도, 그렇다고 너무 가까워진 것도 아닌. 그게 사람 더 답답하게 하도 애태우는 건지도 모르고 걘 그랬다.

  거슬린다. 거슬린다는 것은 그러니까. 말 그대로 눈에 밟혀서 생각을 지워낼 수 없다는 것. 민형은 어느덧 제가 쓴 가사 그 행간이 온통 분홍빛인 것을 깨달았다. 너 요즘 연애하냐. 물어 오는 동아리 부원들은 민형의 대답은 듣지 않고 곧장 저들이 추측하기 바빴다. 그럴 거면 왜 물어. 2학년 한 학기를 그렇게 멍하게 보낸 결과물은 오직 재민을 녹여 낸 가사 뿐이었다. 내가 왜 걜 좋아하지. 스스로에게 묻고 재차 검증하고, 또한 부정이라도 해 보려는 노력조차 허용해 주지 않은 채 민형은 자신이 재민을 언젠가부터 사랑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 것이다. 난 졸음에 빠진 채 가사에 네 이름 석 자 정직하게 박아 넣고, To. 뒤에 구불고 기울어진 글씨로 네게 바친다며 써 둔 그런 것들이 내 착각의 산물이길 간절하게 바랐는데. 나는 어째서 네 그 호의를 무의식에 호감으로 받아들이고 또한 호의를 기대하고만 있었나. 또, 오해는 이런 식이다. 진작의 것과는 또다른 오해. 실감했다. 실감하는 것에는 아무래도 적응하기까지 주어질 일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재민아, 내가 널 좋아해.
  저두 형 좋아하는데.

  재민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민형은 그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같은 복도를 걸으며 그런 한 순간의 감정을 떨친 채였다. 재민은 애석하게 그 언어를 놓치지 않고 몸을 바로세웠다. 흰 하복에 창백하리만치 희멀건한, 길게 뻗은 그 목 위로 반 년은 제 마음을 고생시킨 그 애 그 예쁜 얼굴. 막상 고등학생 되니까 바쁘더라구요. 민형이 내린 커피를 받아 마시며 오랜만에 왔음에도 변한 게 없는 집을 둘러본 재민이 대답했다. 솔직히, 약간…. 재민아. 너 안 찾아와서 쫌 서운했어, 나. 그런 토로 비슷한 말에도 친절하게 얼굴 하나 붉히지 않으며 대답하던 너, 재민아. 내가 널 몇 년을 봤지. 눈동자가 흔들리네. 너 조금 당황했구나.

  오랜 자의 눈썰미, 우리 꽤 오래 본 자들의 눈치.
  수월한 연애는 만나 온 기간이 길수록 능숙하고, 위태로운 연애 또한 만나 온 기간이 길수록 안타깝다.


  여섯.
  날이 희붐히 밝아 왔다. 느즈막이 잠을 청하면 마주하는 부연 하늘. 안개가 끼고, 바지런히 활동을 재개하는 온 만물들. 아무리 인간이 부지런하다 한들 자연에 견줄 수 없다. 나는 젖혀 놓은 커튼을 걷어 친다.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방. 그것은 밤을 흉내내는 것에 아주 능한 재줄 지닌 도구다. 내 하루는 조금 늦게 시작해 늦게 끝난다. 그 늦은 여유를 나는 사랑하고 있고. 스피커에서 가장 사랑하는 음악이 재생된다. 그 다음 곡은, 네가 가장 사랑하던, 아니 사랑했던. 사실 어떤 것이 옳은 서술어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네가 여전히 이 곡을 즐겨 듣는다면 그 두 개 전부 다 아닌 네가 가장 '사랑하는' 곡이 될 테니까.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내가 널 사랑하고, 너도 날 사랑하던 때가.

  함몰된 곳에 발을 헛디뎌 휘청였다. 비가 지독하게 내리는 날이다. 어디든 거칠게 쏟아 붓는 빗방울이 원을 덧그리는 행위들만 수없이 반복되는 절경 탓에 앞뒤 좌우 깊이 구분도 하지 못할 지경에 놓여 그러했다. 늦장마였다. 기단이 물러나는 듯 보였는데 웬 변덕이 도졌는지 갑자기 방향 틀어 되돌아오는 게 원인이 되어 쏟아지는 그런 비. 그게 개고 나면 날은 급격하게 차가워질 것이다. 이별한 연인의 것들처럼. 늦장마는 길지 않다. 길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길지 않은 거다. 긴 것이 아니니까 꼭 누군가 미련을 끌어안은 거지. 그 사람은 여전히 부푼 마음을 하고 지나간 날들만 추억하고 있다. 추억팔이, 즉 싸구려 감성팔이. 보고 싶다. 보내지 못한 글자 고작 그 몇 갤 달랑 남겨 두고서. 판연히 미련 남은 게 보이는데 자긴 상대를 잊은 줄로만 아는 멍청이도 더러 있었다. 그런 사람 만나면 고생이다. 미래를 함께할 사람을 두고 과거를 추억하는 일은 아주 끔찍하다.
그래서 사실, 나는 내가 진리를 알면서도 끔찍한 짓을 잘만 저지르고 있는 그런 미물임을 잘 알고 있다.

  ―쓴다는 것은 '영원한 귓속말'이다. 없는 귀에 대고 귀가 뭉그러질 때까지 손목의 리듬으로 속삭이는 일이다. 완성은 없다. 가장 마음에 드는 높이까지 시와 함께 오르다,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박살은 갱생을 불러온다.

  나는 몇 번이고 살아난다. 내가 쓰는 시는 가난한 자의 것으로 헐값에 팔려 넘어가지만 그걸로 족하다. 짧은 내 여러 생애,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몇백 번은 죽고 수백 번 회생하는 날 영원토록 사랑해 줄 누군가. 나재민의 시집은 맥락이 없고 울음에 짓무른 눈가를 다시 한 번 더 쓸어내는 과정을 이끄는 제안서에 불과하지만, 나재민의 산문집은 그 정도 가치조차 안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썼다. 나는 쓴다. 글을 썼다. 그것이 수백 번을 수천 번으로 끌어내릴 아수라의 한 형태로써 자신을 또 다시 박살시킬 것을 모르지 않는대도.

  있잖아, 알고 있는데도 당신은 대체 얼마나 많은 것들의 속임을 눈감아 주고 있는 걸까?


  일곱.
  전등이 자꾸만 뒤척였다. 사람도 짐승도 아닌 것에 무슨 그런 표현이냐 물을 수 있겠지만 내가 표현하려던 그것은 빛이 명멸한다는 소리다. 이 거리의 야경은 적응되지 않았다. 적응되지 않는다는 것은 겪을 적마다 새로운 기분이 든다는 의미이다. 길이 낯설었다. 낯설지 않은 너와 손 붙들고 걷던 이 길이 그답지 않다. 내 청춘을 네게 탕진하고 보니 남은 게 네 흔적이다. 때묻지 않은 곳이 없고, 스미지 않은 곳이 없다. 물건 하나 짚기만 해도 연상되는 기억에 넌더리가 나는 게 정상이어야 했는데, 가끔은 돌려 보낸 널 곱씹게 되었다. 고등 생물이 느끼는 가장 값싼 감정, 그건 성욕도 사랑도 뭣도 아닌 후회일 거다.

  이명이 불러 세워, 그것이 쏟아지는, 오늘과 같은 밤이 있었다. 내 하루에 그런 악몽 비슷한 경험이 개입하고 있단 게 무작정 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가끔은 반가웠고, 그렇게 잠들지 못하는 밤마저 사랑해 보려고 했다. 같은 짓을 하는데 그걸 보는 자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하여 내게 심지어는 그게 와닿았다. 호흡곤란이 올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힐 거다. 막혀 죽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한 순간 공포에서 벗어났다. 떠오른 사람이 너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되어 걜 어떻게 불러야 할지 여전히 고민 중이다.

  ―붉었던 자리는 발자국도 없이, 사라졌다.
  꽃은 가고 꽃을 가졌던 자리만 남았다.

  우리 생일이 꽃 다 지고 녹음만 우짖는 팔월인 것처럼. 넌 이제 영원히 내 생애에 널 닮은 빛깔의 고운 꽃을 떨구지 않을 테지. 아니, 못한다는 것이 더 옳겠다. 우리는 어느덧 남이 되었다. 한때 서로에게 죽고 못 살던 기억. 그런 기억은 단편적이고 현재는 자꾸만 뒤로 물러난다. 추억하는 날에서 자꾸만 멀어진다. 이러다 궤도를 벗어나 혼자 방황하게 될 거다. 천하의 우주미아가 되어버릴 거고, 나는. 그렇게 굴었던 이민형은 네 중력에 여전히 이끌린 궤도를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채다.
쫓겨나고 싶으나 쫓아내 달라는 말조차 어색할 우리는 이토록 남인가. 


  #기록을 끝내며
  ―꿈을 꿨어.
  무슨 꿈?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꿈.
  비를 맞았어?
  아니.
  울었어?
  글쎄.
  누가 누가 나왔어?
  내가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 어린 사람들.
  생각을 조종할 순 있지만 꿈을 조종할 순 없어.
  지나간 꿈이야.
  조금만 눈을 감고 기다려봐.
  내 머리카락이 내 잠에 엉켰어.
  꿈을 꾸고 있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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