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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게

나른

 

 

 

 

 

 

 

 

 

 

 

 

 

 

 

 

 

 

 

 

  재민은 펜을 놓았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말고 있던 몸을 등받이에 기대며 몸을 폈다. 오후 7시 14분. 재민은 깜빡이는 시계를 보다 창으로 눈을 돌렸다. 여름의 오후는 해가 쉽게 지지 않았다. 길어진 해만큼 생각도 깊어지는 재민이었다. 구질구질하게 뭐 하는 짓인지. 재민은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마무리 짓지 못한 편지를 봤다. 아무렇게나 뒹구는 펜이 꼭 자길 닮았다고 생각했다.

 

 

  동혁과 함께 지내던 짧은 시간은 꿈 같았다. 고작 한 달 남짓, 재민은 그게 스물다섯의 전부였다. 인준의 친구였던 동혁, 인준의 또 다른 친구였던 재민. 셋이 처음 만난 건 인준이 차이던 날, 전화로 아무나 불러냈는데 그게 마침 동혁과 재민이었다. 서로 모르던 사이였던 둘은 이미 취해서 인사불성인 인준을 어색하게 잔을 비웠다.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자 말이 트였다. 한참을 얘기하며 동혁은 등받이에 바짝 붙었던 등을 뗐고, 재민은 테이블 위로 팔을 올려 턱을 "n다. 둘은 눈이 마주친 동혁과 재민은 말이 없어졌다. 눈을 피하지도 않았다. 둘은 이게 무슨 뜻인 줄 알았다. 재민이 동혁과 눈을 맞춘 채 들고 있던 잔을 비웠다. 잔이 바닥을 보이자 동혁은 인준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했고, 재민은 핸드폰으로 빠르게 택시를 잡고 인준을 챙겼다. 택시에 인준의 가방과 인준을 그대로 밀어넣었다. 동혁은 재민의 손목을 잡았다. 걸음이 빨라졌다. 한참을 말 없이 걷다 동혁이 입을 뗐다. 여기서 집 가까워. 재민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괜히 웃음이 나왔다. 동혁은 괜히 걸음을 더 빨리 했다. 동혁은 취해도 틀리지 않던 현관 비밀번호를 두 번이나 틀려 못 들어갈 뻔 했다. 재민은 그걸 보고 또 크게 웃었다. 현관에 들어가자마자 동혁에게 입이 막히고 나서야 웃음이 끊겼다.

 

  하나, 둘, 셋. 끝이 묶인 콘돔이 바닥을 뒹굴었다. 동혁은 눈을 겨우 뜨고 천장을 보다 옆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베개에 눌린 재민의 볼이 귀여웠다. 동혁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눈을 가리던 재민의 앞머리를 넘겨 주며 재민의 얼굴 곳곳에 입을 맞췄다. 둘의 8월은 그랬다. 동혁의 원룸에 재민의 짐이 하나씩 늘었다. 식기들을 새로 맞췄고 칫솔은 두 쌍이 됐다. 안 그래도 좁은 책상에 재민의 것들이 함께 뒹굴었다. 헹거에는 옷들이 꽉 차 결국 하나를 더 장만해야 했다. 둘은 매일같이 섹스했다. 눈이 마주치는 대로 입을 맞췄다. 같이 밥을 먹다가도, 게임을 하다가도, 영화를 보다가도 섹스를 했다. 붙어 있으면 붙어 있는 대로 만지고, 물고, 빨았다. 인터넷에서 시킨 콘돔은 금방 바닥이 났다. 둘은 그게 좋았다. 눈을 감을 때까지 보이는 서로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서로가 좋았다. 동혁아, 나 사랑해? 응, 사랑해. 재민아, 사랑해. 재민은 지금까지 보냈던 여름 중 가장 뜨거운 여름을 보냈다.

 

 

  재민은 담배를 물었다. 동혁이가 방에서 담배 피우지 말랬는데. 연기가 재민의 머리 위로 흩어졌다. 동혁과 같이 피우던 담배는 바꾸지 못 했다. 동혁의 집에서 가져온 것들을 다 바꿨는데 담배 하나를 못 바꿨다. 이렇게라도 동혁을 잡고 있는 자신이 우스웠다. 결국 잊지 않을 거면서 왜 그렇게 다 비웠을까. 고작 동혁 하나 없는 방이 낯설어졌다. 아직 긴 담배를 재떨이에 지졌다. 재민은 멍하게 편지를 바라보다 다시 펜을 잡았다.

 

 

 

  동혁아, 안녕. 벌써 네가 없는 두 번째 여름이야. 너를 여름에 만나서인지 네가 여름을 닮아서인지 여름만 되면 네가 생각나. 올해 여름은 생각보다 덥지 않더라. 이것도 네가 없어서일까. 너랑 있을 때는 그렇게 더웠는데. 넌 몸에 열이 많아서 더위를 많이 탄다고 했잖아. 올해 넌 어떨까? 너는 여전히 더워서 녹아 있을까. 더위 못 참고 늘어진 너 보면 진짜 귀여웠었는데.

  나 지금 사실 조금 억울해. 이렇게 여름만 되면 네가 떠오르는 게 말야. 벌써 두 번째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있을지 모르는 여름을 너 없이, 너로 가득하게 보내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하고 좀 울고 싶어져. 너랑 지냈던 여름들보다 많은 여름을 너랑 보내야 한다는 게....... 이것도 한두 번일까? 나는 아닐 것 같아. 감정은 확실히 바뀌겠지만 네 생각은 여전할 것 같아. 계절이 통째로 너라는 게 얼마나 큰 의미인지 모르지. 앞으로 여름이 더 길어진대. 네가 떠오르는 시간이 더 길어진다는 뜻인 거 같아서 조금 숨 막혀.

  너는 내가 널 잊었음 좋겠다고 했잖아. 네 기억에 내가 남아도 내 기억엔 네가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그래서 너는, 네 기억엔 내가 아직도 남아있니? 네 기억에도 나는 네 여름일까?

  동혁아.

  나는 아직도 이렇게 너를 사랑해서,

  너를 죽도록 사랑해서,

 

  언제까지 나한테 이렇게 쏟아질래, 동혁아. 언제까지 이렇게 나한테 쏟아져 주라, 동혁아. 네 기억에서는 희미해져도, 나한테는 선명해졌으면 해.

  동혁아.

  이동혁.

  보고 싶어.

 

  재민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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