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점순이
난독
점순아. 점순아.
아 왜.
오늘 급식 뭐 나와?
치킨 샐러드.
점순아. 얘. 점순아. 동혁아. 점순...
"아 왜!"
"뭐... 왜?"
일주일 중 가장 피곤하다는 수요일. 그것도 점심시간과 먼 듯 가까운 듯 하는 삼교시 국어시간. 참사는 거하게 터졌다. 재민의 끈질긴 부름에 빽 소리를 질러버린 동혁이 갑자기 분위기 싸해진 교실 안을 둘러봤다. 시선 삼십 개 정도가 이동혁 얼굴에 박힌 점 세 개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교탁 앞의 선생님은 안경을 쓱 중지로 올려 쓰더니 나긋나긋한 사형선고를 던졌다. 이동혁 넌 수업 끝나고 선생님 좀 따라 나와라. 딩동댕동. 다분히 시트콤 같은 상황 속에서 타이밍 좋게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고 이동혁 인생의 종도 울리고. 아악 나재민. 나재민! 속으로 포효하며 갈색으로 쌔끈하게 염색한 자기 머리카락을 막 쥐어뜯고 흔들다가 순순히 교무실로 끌려갔다.
망할놈의 학교는 삼십 명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땀 삐질 나오는 교실은 내버려두고 교무실만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어놨다. 땀이 식어야 정상인데 등골을 타고 오싹한 예감과 함께 식은땀 한 줄기가 흘렀다. 뒷짐을 지고 서서 바닥 타일에 찍힌 점의 갯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너 요즘 반항기니?"
그럴 리가요. 사춘기는 열네 살 때 잠깐 왔었다가 속옷만 입고 이제노네로 내쫓긴 이후부터는 잠잠했다. 사춘기가 온 건 나재민이다. 아니면 이렇게까지 날 골탕먹일리가 없다. 이동혁은 자신이 늦은 사춘기라는 추정을 부정하는 대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뇨... 아까 그건 제가 그냥... 네... 죄송해요... 앞으론 수업시간에 하리보 안 먹겠습니다... 안 떠들겠습니다... 나재민하고 쎄쎄쎄 안 하겠습니다...
온갖 사죄의 발언을 하고 쉬는시간 십 분을 다 날려먹는 설교를 들은 후에야 교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눈에 독기를 머금은 이동혁이 뒷문을 열어제끼며 야 나재민 나와라! 하고 까오를 잡을 때 이미 교탁 앞엔 수학 선생님이 서 계셨다. 눈치를 보다 얌전히 기어서 맨 뒷자리 나재민 옆에 앉은 이동혁이 눈물을 머금고 엎어졌다. 동혁아. 쌤한테 혼났어? 몰라... 나 이제 앞으로 너랑 쎄쎄쎄 안 해...
삼 주 전부터 나재민은 이동혁을 점순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햇빛 내리쬐는 운동장에서 공을 차던 동혁에게 사 반 창문에서 빽 소리를 쳤다. 점순아! 그 날 이동혁은 자살골만 세 번을 넣었다. 공을 잡고 판을 리드하려고 하면 점순아! 골문 앞에 서면 점순아! 멈칫 멈칫 하는 이동혁을 보더니 육반 애들도 점순아! 우리반 애들도 점순아! 점순아! 아 쫌 그만 쫌 하라고! 내가 왜 점순인데!
"점이 많으니까."
나재민은 이제노 무릎 위에 앉아서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면서 그렇게 답했다. 허리를 곧게 편 재민의 뒤에 가려져 있던 제노가 옆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점순아. 오늘 축구 이겼어? 동혁은 먹으려고 사 온 피자빵을 바닥에다 내팽개쳤다.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개지만 개중에 가장 하찮은 방법이었다. 씩씩거리던 동혁은 당장 점 빼러 갈 거라고 조퇴 시켜달라며 담임한테 징징거리다가 실외청소를 떠안았다.
나재민이 주구장창 이동혁을 괴롭히는 이유는 별 거 없었다. 점이 많으니까 점순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냐는 말에 딱히 반박하지도 못했다. 점순이 점순이 거리는 나재민보다 옆에서 한두 마디씩 거드는 이제노가 더 얄미웠다. 꼭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이동혁은 삽시에 온 학교에 점순이로 퍼졌다. 드림고 대신 전해드립니다. 삼학년 전순이 선배 진짜 잘생겼어요 너무 좋아해요 익명이요. 야 근데 전순이가 누구냐. 전순이라는 이름 삼학년에 있어? 점순이 잘못 들은 거 아님? 야 이동혁 점순아 너랜다. 아 씨바 진짜...
일학년부터 삼학년까지 동혁의 아이덴티티를 모르는 애는 거의 없게 됐다. 페북에 올라왔을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아니 이미 그 때 망하긴 했는데 아무튼 전교생이 다 아는 건 아니었단 말이야. 그런데 체육시간에 체육복을 잃어버린 게 화근이었다. 방송부였던 나재민이 분실물 방송 담당이 아니었더라면, 그 체육복에 내 이름이 안 써져 있었다면, 체육복을 주운 황인준이 그걸 그냥 나한테 곱게 가져다 줬더라면...
파란색 자수로 이동혁이라도 새겨져있는 체육복을 분실하신 점순이는 방송실로 와서 찾아가주세요.
나재민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점순이 점순이 점순이 에코 낭낭한 마이크로 이동혁의 삼 주 된 별명을 읊었고, 아마 전교생이 그 방송을 들었을 테니까. 드림고 공식 점순이는 누구냐고 하면 모두들 입을 모아 이동혁? 이라고 답한대도 할 말이 없는 거라고. 동혁은 그 날 체육복을 가지러 가지 않았다. 방송실로 재민을 잡으러 부리나케 뛰어가는 길에, 야 근데 왜 점순이가 별명일까. 글쎄 점이 많은가? 하고 떠드는 이학년 여자애들이 왜인지 자길 힐끔힐끔 쳐다보는 것 같아서. 고대로 유턴해서 이제노 반으로 가서 울었다. 내가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러는 거야... 엉엉...
제목. 점순이. 지은이. 나재민.
우리 점순이.
회오리 감자.
참 좋아하는.
우리 점순이.
회오리 감자.
잘 뺏어먹는.
우리 점순이.
우리 동혁이.
시 창작 수행평가에서 나재민은 A를 받았다. 아이들은 나재민의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폭소하다가 기립박수를 쳤고, 목부터 머리 끝까지 새빨개진 이동혁은 벌떡 일어나서 야 나재민! 소리를 빽 질렀다. 나재민은 태연한 얼굴로 우리 점순이 형아가 회오리 감쟈 사줄게. 다정하게 말하고서 사뿐사뿐 제자리로 돌아와 앉은 에티튜드를 보였고, 이동혁은 바들바들 떨다가 실수로 찢은 수행평가 용지 때문에 C를 받았다.
거기서 비극은 끝나지 않고 나재민의 점순이 회오리감자 뭐시기 하는 시는 복도에 내걸렸다. A 받은 시만 걸어놓는 거랬는데 유난히 나재민 시가 크게 프린트 되어 붙어있었다. 그 쯤 되니까 이동혁을 이동혁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점순이라고 부르는 애들이 더 많았다. 아, 걔, 누구지? 그 왜 있잖아. 축구 잘 하고 과동 들어간 문과 걔... 점순이? 어 맞아 점순이.
이동혁은 핫식스 세 캔을 빈속에 왁왁 처먹고 취해서 나재민한테 보톡을 걸었다. 야... 나잼... 너 너무하지 않냐...? 내 이름 부르는 애보다 점순이라고 부르는 애가 더 많어... 응 동혁이 핫식스 마시고 취했어? 집 들어가서 발이나 닦고 자. 난 제노랑 영화 보러 간당. 그 길로 핫식스 세 캔을 더 사마시고 다음 날 학교 대신 병원으로 등교했다.
"점순아. 학교 왜 늦게 왔어?"
"너 때문이다..."
"왜 그게 재민이 때문이야. 니가 핫식스만 먹으니까 그렇지."
나재민은 순진무구한 얼굴로 커피를 빨았고 이제노는 은은하게 나재민 쉴드를 쳤다. 세상에 내 편 하나 없다더니.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배를 부여잡고 자리에 앉았다. 복통의 또다른 주범인 이제노가 자기 반으로 사라지고, 나재민은 옆에서 계속 종알거렸다. 동혁아. 점순아. 많이 아파? 보건실 데려다 줄까? 아니 됐거든...
그렇다고 나재민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수는 없다. 나재민은 그런 힘이 있는 게 분명하다. 밉지 않게 보이는 힘. 같은 짓거리라도 이동혁이 하는 것과 나재민이 하는 것엔 상대방의 반응이 달랐다. 예를 들어서 황인준한테 체육복을 빌린다고 하자. 그럼 나재민은 편의점에서 초코우유 같은 걸 사서 황인준네 반으로 간다. 황인준은 초코우유를 받아들고 맛있게 먹을게, 가벼운 인사치레를 하고선 체육복을 간단히 빌려준다. 하지만 이동혁한테는?
"없어."
"아까 삼교시에 이제노한테 빌려줬었다매."
"어. 네 건 없어."
매정한 놈. 이동혁은 초코우유에 칸쵸까지 사들고 가도 안 된다. (이건 아마도 신뢰도의 차이겠지만 동혁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결국 체육시간에 교복을 입고 뛰다가 바지가 찢어지는 바람에 종일 나재민 체육복 바지를 빌려서 입고 있어야 했다. 운이 존나 별로인 날이었다. 물론 나재민이 이동혁한테 점순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날부터 계속 별로였지만 오늘이 더 그랬다. 동혁이 책상 위로 볼을 댔다. 고개를 돌리면 창 밖이 보일 텐데 하늘만 덩그러니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어서 굳이 나재민 쪽을 쳐다봤다. 한 쪽 귀로 들리는 선생님 목소리는 그대로 반사해버린다.
근데 진짜 속눈썹 오지게 길다. 입술도 되게 분홍색이고. 눈도 안 깜빡거리고 나재민을 관찰했다. 살짝 뜬 머리카락, 작은 귀, 순진한 눈, 그런 거. 걔가 아니면 잘 상상할 수 없는, 왜, 만화에 나오는 사슴같은 이목구비. 칠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나재민이 고개를 돌렸다. 이동혁의 새까만 눈이랑 마주쳤다. 하나, 둘, 셋, 이동혁은 속으로 수를 셌다. 눈싸움 하는 기분이 들어서. 근데 셋까지 세고 잊어버렸다. 숨이 좀 막혔다. 재민이 집요하게 동혁과 눈맞춤했다.
김유정의 동백꽃에서 등장하는 감자는, 나를 향한 점순이의 애정을 드러내는 소재라고 할 수 있어요. 적극적이고 집요한 점순이의 감정표현과 복수는 나와 갈등을 빚지만, 나중엔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며 화해와 사랑의 분위기를 형성하게 됩니다. 여기서 점순이는...
"쌤. 동혁이 자요."
아 씨발 나재민! 속으로 욕을 철썩 뱉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앉았다. 저 안 자요 쌤. 한 쪽만 눌린 머리가 다 개 구라 뻥이라고 열변해주고 있었다. 삼십 명의 눈이 또 꽂혔다. 금세 교실이 다 웃음바다가 됐다. 나재민은 고작 이동혁이 엎드려 있다는 사실을 잔다는 허구로 부풀려서 꼰지른 걸론 아무 감흥이 없다는 듯이 펜을 쥐고 동글동글한 글씨체로 끄적거렸다.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동혁이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나재민은 모른 체 했다.
동혁아. 너 요샌 하루에 한 번씩 교무실에 불려오는 것 같아. 이만 가 봐. 얼굴에 철판 까는 걸론 학년에서 일등이라는 이동혁도 1일 1교무실의 머쓱함은 견디기 어려웠다. 자리를 바꿔야겠어. 나재민하고 마주치지 말아야겠어. 근데 같은 반인데다가 집 가는 방향도 같고 이제노랑 황인준은 나재민 없인 나 안 끼워준다. 동혁이 머리를 쥐어뜯었다. 너 그러다가 젊은 나이에 탈모 온다. 황인준이 초코우유를 쪽쪽 빨며 첨언했다. 아주 고맙다 진정한 친구 새끼야...
나재민과의 냉전을 선언했다. 물론 이제노와 황인준에게만. 등교 시간이 비슷해서 아침 일찍 도착해 아무도 없는 교실에 덩그러니 둘이 앉아 입을 다물고 어색하게 있어야 한다는 것만 빼면 나름 괜찮았다. 나재민이 먼저 점순아, 하고 불러도 짧게 대답해주고 말았다. 다른 애들이 눈치채기 전에 나재민이 먼저 알았다. 몇 번 말을 붙여보다가 저도 질렸는지 내내 졸거나 공책에 그림만 그렸다. 점순이 소리를 더 안 들으니까 좋긴 좋았다. 근데 뒤질 것 같이 지루했다.
말을 안 걸어주니 더 미웠다. 지가 먼저 점순이라고 불러놓고. 마음 한켠이 답답했다. 체육 시간에 또 자살골을 넣었다. 점순이 대신 자살골천재라는 별명이 새로 생겼다. 별로 기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루종일 나재민 눈치만 봤다. 냉전을 선포한 건 이동혁이었는데 눈치가 보였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태연하게 그림만 그리는 나재민을 보다가 입이 근질거렸다. 아 몰라. 몰라. 책상 위로 팍 엎어졌다. 그냥 점순이 소리 안 들으려고 그런 건데. 이러다가 영영 멀어지면 어쩌지? 계속 말 안 붙이고 그러다 막 십 년 뒤에 동창회에서 만나서 어 안녕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우리가 그 땐 많이 어렸지 내가 나빴었어 하는 사이 되면 어쩌지? 환장할 것 같았다. 그러다 깜빡 잠들었다.
눈을 떠보니 종례도 다 끝나고 청소도 다 끝나서 교실이 텅 비워져 있었다. 이동혁이랑 나재민 자리만 빼고. 동혁이 다 못 뜬 눈을 끔뻑거리다가 손등으로 막 문질렀다. 재민이 시야에 흐릿해졌다가 선명했다가 또 잠깐 흐릿했다가 요란했다. 얘가 진짜 나재민인가. 왜 아직도 안 가고 여기 앉아있지. 온갖 의구심이 들었다. 혹시 나한테 화해하자고 말하려고 그러나. 그럼 난 뭐라고 반응해야 하지.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아무튼 잘했다. 동혁이 일어난 걸 한참 쳐다보던 재민이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
"안 가, 동혁아?"
"어? 어... 가야지."
얼결에 가방을 매고 따라나섰다. 어제처럼 그제처럼 똑같이 걷는 길인데 공기가 무거웠다. 아무도 아무 말도 안 했다. 학교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방과후마다 남아서 축구만 하는 축구 미치광이들도 오늘은 없었다. 나재민하고 이동혁 밖에 없었다. 해가 이제 막 지려고 땅으로 당겨지는 중이었다. 이동혁 신발 끄는 소리만 직직 들렸다.
집 가는 길이 같았다. 이제노와 황인준이 먼저 간 걸 보면 이동혁과 나재민만 남기려고 둘이 작정한 셈이다. 나재민 뒤만 졸졸 따라가면서 궁시렁거렸다. 냉전이라고 했는데. 꼭 쓸데없는 짓을 해요. 근데 걔네 둘이 정말로 먼저 가지 않았다면? 나재민과 단둘이 있을 시간이 없었다면? 좀 싫었다. 오래 끌고 싶은 냉전은 아니었다. 그냥, 수업시간에 잔다고 꼰지른 거 복수하는 거였으니까...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조금 더 쪼그라들었다. 나재민의 동그란 뒷통수만 쳐다보다가 흠흠 헛기침 했다.
"동혁아."
"뭐 어? 어. 뭐, 나? 어 그래 왜?"
당황한 티는 누가 봐도 선명했다. 그렇지 않은 척 머리를 긁적거렸다. 괜히 발길질을 해대며 바닥에 굴러가는 모래를 찼다. 모래가 나재민 바지에 튀었다. 그걸 알고선 발길질을 멈췄다. 신발 끄는 소리마저도 없어지니까 세상이 다 조용했다. 나재민 숨소리만 들렸다. 아 이런 거 싫은데. 이름 불러놓고 왜 뭐. 빨리 말하지. 다리를 달달 떨었다. 여기서 딱 우리 친구 그만하자는 대사가 나올까 봐 엄청 초조했다. 그래도 안 그런 척 했다.
"넌 내가 이제 싫어?"
"뭐, 뭐? 뭐라고?"
내가 이제 싫어졌어? 나재민이 그 순진무구한 눈으로, 맨날 이동혁 놀릴 때나 써먹던 사슴같은 눈으로 물어봤다. 표정은 어땠냐면, 그냥 호기심. 진짜로 물어보는 거. 싫냐고 따지는 투도 아니었고, 서운하다는 뉘앙스도 아니었고, 그냥 물어봤다. 거기서 또 괜히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괜히 불량한 태도를 취했다. 얼굴을 팩 찌푸리고 한 자 한 자 씹어서 뱉었다. 싫다면 어쩔 건데? 아, 이거 아닌데. 망했다.
나재민은 잠깐 고개를 숙여서 귀를 만지작거리더니, 한 발자국씩 가까이 다가섰다. 뭐야. 왜 와. 오지 마. 동혁이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처럼 뒷걸음질을 쳤다. 그래도 안 멈췄다. 재민이 두 발, 동혁이 한 발, 그러다가 화단 바로 앞까지 왔다. 뒷꿈치가 턱에 걸려 뒤로 엎어졌다. 노란 꽃 사이에 파묻힌 동혁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재민을 올려다봤다. 나재민이 화단 위로 올라가 이동혁 옆에 쪼그려 앉았다.
"난 너 점순이라고 부르는 게 좋아."
"아니, 아니 그게 왜 좋은데 대체?"
"내가 붙여 준 거니까."
남들 다 알고 다 부르는 네 이름 말고. 그거 말고. 점순이는 내가 너한테 붙여 준 거잖아. 그래서 계속 부르고 싶었어. 점순아.
쪼그라들고 쪼그라들어서 쪼그라들었던 마음이 한순간에 팽창했다. 훅 부풀어서 팝콘처럼 펑 튀는데 말릴 새도 없었고 긴장할 틈도 없었다. 그냥 나재민이 터뜨려버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버버 아무 말도 못하게.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냉전을 선포하고 의기양양하다가 금방 시무룩해지고 온갖 감정변화를 겪었는데 이제는 나재민 때문에 또 막 좋다. 아주 미칠 지경이다.
이름도 모르고 심어진 노란 꽃이 까무잡잡한 뺨을 간지럽혔다. 눈을 세 번 깜빡거렸다. 나재민도 그걸 따라했다. 재민이 한참 동혁을 쳐다봤다. 일어나라는 무언의 전달이었는데 통하질 않았다. 이동혁은 그냥 혼자만의 공간에 빠져 좀 멍해보였다. 재민이 먼저 일어섰다. 무릎에 손을 짚고 접힌 다리를 쭉 펴려는데, 동혁이 손을 쭉 뻗어 손목을 잡아채고 끌어당겼다. 철퍼덕 엎어졌다. 노란 꽃 냄새가 이렇게 좋았는진 처음 알았다.
눈을 세 번 깜빡거렸다. 이동혁도 그걸 따라했다. 주변이 아마 아까보단 소란스러워졌다. 운동장에 축구 광인들이 돌아온 게 분명했다. 야, 야 패스! 이리 좀 와! 더 가까이! 어 그렇지! 이동혁은 귀가 먹먹하다고 생각했다. 눈 앞도 좀 흐렸다. 꽃 알레르기가 있나? 코 끝이 간지러워야 했는데 애꿎은 가슴팍만 간질거렸다. 왜지? 왜일까? 둘의 틈이 점점 좁혀졌다. 바람이 아니라 나재민 날숨이 뺨에 닿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동혁이 느리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쪽. 미숙한 소리를 내며 볼에 버석한 입술이 스쳤다가 떨어졌다.
"어, 나 너 좋아하나 봐..."
우리 어떡하지? 동혁의 물음에 재민이 되물었다. 글쎄. 어떡할까. 혼란스러운데 별로 혼란스럽지 않았다. 사랑스럽지 않은데 엄청 사랑스러웠다. 이상했다. 한 번 더! 이쪽으로! 거기 거기! 축구 광인들의 목소리가 이번엔 너무 시끄럽게 들렸다. 나재민이 눈을 감았다. 조금만 더 와! 뛰어! 뛰긴 이동혁 심장이 돈 것처럼 뛰었다. 쿵 쿵 쿵 쿵. 고개를 기울였다. 이번엔 코 끝에 숨이 닿았다. 미숙한 소리도 없이 입술이 맞닿았다. 바람이 불어 꽃이 막 흔들렸다. 이동혁과 나재민이 노란 꽃 뒤로 숨었다.
선생님이 동백꽃을 읽고 처음 느꼈던 건, 어린 애들의 사랑 같다는 거예요. 다투고 서로 미워하고 그게 애정인지 아닌지 잘 구분하지 못하죠. 하지만 결국엔 서로 깨닫게 되는 순간이 와요. 우리가 미워하는 누군가를 사실은 좋아하고 있던 게 아닌지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머리카락은 갈색, 꽃은 노란색, 입술은 분홍색, 귀는 빨간색. 다채롭게 섞여들어가는 색들 속에서 미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오늘 날이 덥더라. 가을이 아니라 봄일지도 모르겠다. 이동혁이 코앞에서 중얼거렸다. 나재민은 그냥 웃었다. 말 그대로, 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