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채기
주인장
재민아, 솔직하게 말해야 되는 거 알잖아.
동혁이를 봐서라도 제발 뭐라도 좀 말 해봐.
동혁이라는 이름이 재민의 귀에 박히자마자 몸을 흠칫 떨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고, 책상 밑에 곱게 포개져있던 손이 입 근처로 올라갔다. 7살 때부터 이어진 악습관이었다. 너가 보면 싫어할 걸 알았다. 손을 다시 책상 밑으로 내렸다. 손을 꽉 쥐다 못해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는 듯 했다
동혁아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눈물만 핑 돌았다. 핏기 없는 입술을 깨물었다. 혀에서 피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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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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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8월 18일. 목요일. 날씨 흐림
오늘은 개학 첫날이고, 새학교를 맞이하는 날, 그리고 새로운 상담사를 만나는 날이었다. 말만 번지르르하지 그저 그런 하루일게 뻔했다. 역시나 새로 보는 얼굴에 들떠 날 잡아먹을 듯이 보던 같은 반 학우들은 미적지근한 반응에 떨어져나갔다. 근 10분만이었다. 아직 어디에 무슨 교실이 있는지 잘 모른다. 급식을 어디서 먹는지도 모른다. 바람을 타고 창문으로 들어와 교실을 채우는 급식 냄새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점심 시간이 되기 전에 조퇴했다.
그래도 집만큼은 인천보다 나을지 모른다.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신경쓰며 손이라도 까딱할라치면 나를 병자 취급하며 손을 거두게 하는 엄마는 없으니까. 형은 나에게 쌀 한 톨만큼도 신경쓰지 않을 것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쌀 한 톨이라도 삶아먹을 수 있는지 구워먹을 수 있는지 모르겠다. 부엌 가스레인지에는 먼지가 끼어있었다. 커피포트의 손잡이 부분이 끈적였고, 쓰레기통에는 컵라면 껍데기와 젓가락이 쌓여있었다. 후에 홀쭉해진 볼을 보고 엄마가 눈물을 훔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됐다. 화장실은 더욱 가관이었다. 배수구에는 길이가 다 제각각인 머리카락들이 실지렁이처럼 엉켜있었다. 자동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난 이 집에서 숨을 쉬며 살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숨을 마셨다. 먼지 때문인지 코가 간지러웠다. 서서히 눈을 뜨곤 다시 내뱉었다. 조금 익숙해진 방 안을 훑어봤다. 어떻게든 숨을 들이쉬면 된다. 그리고 꾸역꾸역 뱉어내면 된다.
어떤 공기를 골라 쉬고, 어떤 타이밍에서 내뱉어야할지 도와줘야 할 사람은 나에게 일기를 쓰는 걸 권유했다. 내 앞에서 미소를 띄고 있는 사람은 의사 선생이었다. 하얀 가운도 입지 않았고, 메스도 쥐지 않았지만 의사였다. 몸이 아니라 마음을 고쳐주는 선생님께서는 내게 파란색 공책을 내밀었다. 얇은 스프링 공책이 너무 하찮아 픽하고 웃음이 새어나왔다. 아니다. 내가 웃을리가 있나, 그냥 멍하게 선생님을 봤다. 꿈벅거리며 눈으로 말했다, 별 걸 다 하시네요.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메마른 입으론 말했다, 쓸게요.
이제 슬슬 손이 아프기 시작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써야겠다.
2018년 8월 20일 토요일 날씨 : 흐림
선생님이 일기를 쓰라고 했지 매일 매일 쓰라고는 하지 않았다. 물론 선생님이 설명할 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서 그런 말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루에 한 편씩 쓰는 건 기대도 안했을 것이다.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난다. 현재 6시 28분인데 물밖에 먹지 못했다. 그것도 수돗물이었다. 여기서는, 형 집에서는 정수기 물은 커녕 페트병 생수도 기대할 수 없었다. 냉장고 안에는 초록색 유리병만 가득했다. 수돗물을 먹어도 되는지 잘 모르겠다. 그냥 수돗물은 아니고 서울의 물 아리수긴 했다. 서울시민이 되니 아리수도 먹고 새로웠다.
마지막 끼니가 어제 학교에서 먹은 급식이었다. 제육볶음, 콩나물국, 깍두기. 평소 같았으면 콩나물만 헤집다가 끝났을 식사를 허겁지겁 먹었다. 급하게 먹느라 두 번 씹을 걸 한 번만 씹었더니 속이 뒤집어졌다. 하늘은 누랬고, 땅과 위치를 왔다갔다 했다. 그 '덕' 이라고 해야 되는지 '때문' 이라고 해야 되는지 조퇴할 수 있었다. 담임은 귀찮다는 듯이 부모님 허락여부도 물어보지 않고 조퇴를 시켜줬다.
대충 계산해도 족히 12시간은 물만 먹은 거 같다. 어젯밤에는 물만 삼켜도 올라오는 위액에 반 강제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오늘 상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액이 식도를 죄다 긁어놔 음식을 넘기기 힘들었다. 덩어리가 지지 않고 목넘김이 가볍지만 포만감이 들 음식이 필요했다. 집 앞 편의점에서 초코우유나 사먹어야겠다. 서울로 올라올 때 들고 왔던 배낭을 뒤졌다. 엄마가 챙겨 준 카드가 나왔다. 불행중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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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걸 쓰고 있는 시각은 11시, 베개를 베고 누워있어야 할 늦은 밤이지만 난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휘적거리고 있다. 가로등 불빛이 맛이 갔는지 자꾸 깜빡거려서 핸드폰 후레쉬를 켰다. 켠지 한 5분 됐는데 벌써 5퍼나 닳았다. 일분에 일퍼센트씩 다나보다. 쓸데없이 딱딱 맞았다. 지금 일기를 어디에 받쳐서 쓰는게 아니다 보니 글이 개발세발이다.
지금 내가 여기 나와있는 이유는 우리 형 때문이다. 저렇게 일기를 끝맺고 잠깐 눈을 감고 떠보니 8시였다. 해는 진 후였지만 늦게 찾아온 태풍 때문인지 공기는 후덥지근했고, 피부는 끈적거렸다. 휴교를 기대해봤지만 교육청은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을 높이 평가해줬다. 아마도 바람에 굴하지 않고 날아오는 간판을 쳐내는 초싸이어인으로 생각하는 거 같다. 긴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바지 안에 땀이 차는 기분이 들었다. 기분이 더러웠지만 편의점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날 진정시켜줬다. 다음에 알바를 잡으며 편의점 알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유 진열대 앞에서 빅 초코우유를 먹을지, 서울우유를 먹을지 한참 고민하다 결국 큰 걸 택했다. 12시간의 공백을 매워줄 큰 놈이 필요했다.
한 손에 우유, 다른 손엔 빨대를 쥐고 집에 갔더니 술판이 벌여져 있었다. 우리 집은 도어락이 아니라 열쇠로 여는 문이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열쇠를 꺼내고 구멍에 열쇠를 맞추려 다른 손으로 문 손잡이를 쥐자 힘없이 돌아갔다. 문이 손톱만큼밖에 열리지 않았지만 왁자지껄한 술주정이 들렸다. 슬쩍 들여다보자 신발장에는 널부러진 신발이 가득했다. 신발 놓는 방법도 참 개성이 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이 친구를 데려온 거 같았다. 그대로 문을 닫고 빌라 계단을 내려갔다. 지어진지 15년이 더 된 건물이라 엘레베이터가 없었다. 4층을 걸어 올라온건데 한숨을 쉬며 욕지거리를 뱉었다.
갈 곳이 없었다. 이제 전학 온지 3일, 서울에 올라온지도 사흘이었다. 여기선 아는 사람이 3명을 넘지 않았다. 우리 형, 담임선생님, 학교 경비 아저씨. 경비 아저씨는 어제 조퇴하느라 알게 됐다. 내 창백한 얼굴을 보고 혀를 차며 교문을 통과시켜줬다.
아는 장소도 세 곳을 넘지 않았다. 집, 학교, 상담.
사실 생각해보니 한 곳이 더 있다. 지금 내가 있는, 진달래 어린이집에 놀이터다. 어제 집에 가다 길을 헤매는 중에 발견했다. 삼거리에서 좌회전인지 우회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아 직진을 택했더니 이상한 목공소가 나왔다. 나무꾼의 작업소였나, 실없고 난생 처음 보는 간판이었다.
지구는 둥그니 계속 걷다보면 언젠가 집에 도착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속 걸었다. 한 10분쯤 걷다보니 아이들의 꺄르륵거리는 웃음 소리가 들렸다. 뭐지 하고 가보니 놀이터에서 어린이집 선생님과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다시 어린이집으로 들어갈 때가 됐는지 풀잎반은 모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둥근 지구를 기대하기에는 내 다리가 너무 아팠다. 선생님한테 집 앞 미용실을 대며 어떻게 가야하는지 물었다. 길 안내를 받고 돌아서려는 차에 어떤 아이가 날 보고 손을 흔들었다. 오빠 안녕, 이라는 말을 덧붙였던 거 같다.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고사리같은 손을 흔드는 걸 잠깐 지켜봤다. 그리고 걸음을 뗐다. 난 그 아이에게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이 놀이터를 찾아낸 건 내 18년 인생 중 제일 잘한 일이라 칭할 수 있다. 이렇게 집 밖으로 나가는 일이 자주 있을 거 같은 예감이 든다. 그네와 친해져야겠다. 집에는 몇시에 들어가야 되지, 4시 쯤에 가봐야겠다. 어차피 내일은 일요일이니 몇시에 일어나든 상관이 없었다.
2018년 8월 22일 월요일 날씨 : 흐림 80%
담을 넘었다. 학교 안에 있기가 너무 거북했다. 조퇴를 하기에는 담임의 얼굴이 보기가 싫었다. 떡 두꺼비같은 얼굴로 껌을 소리 내 씹으며 쓴 소리를 틱틱 쏴댈 인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높아서 낑낑댈 것도 없었다. 딱 내 허리에서 가슴께만큼의 높이였다. 짱돌에 발을 박고 발돋움해 담을 넘었다. 쪽팔리게 오랜만에 몸을 써서 그런지 착지하면서 발목을 접질렀다. 주저앉아 발목을 통통 치고 있는데 학교 안에 있는 남자애와 눈을 마주쳤다. 3초정도 눈을 마주쳤지만 아이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햇빛에 비쳐 갈색이 된 머리카락에 가린 귀가 붉었다.
2018년 8월 23일 화요일 날씨 : 흐림 -> 비
형이 여친을 데려왔다. 새벽 12시였다. 부엌서부터 쪽쪽대는 걸 애써 고개를 숙이고 무시하며 집을 나왔다. 나를 배웅해주는 건 형의 급한 마음을 대변하듯 신발장에서 벗어나 마루까지 튀어나와있는 신발들이었다.
카드, 현금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다. 게다가 난 핑크색 잠옷바지에 커다란 타요가 그려진 티를 걸치고 있었다.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지만 12시여서 길가에 사람이 없다는게 정말 신에게 감사했다. 난 무교지만 어쨌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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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누가 놀이터 앞을 서성이고 있다. 놀이터에 발을 들였다가 다시 뒤로 가기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진달래 놀이터는 입구와 출구가 따로 있다.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해가 안될 수 있는데, 한 쪽으로 들어오면 다른 쪽으로 나갈 수 있었다. 나도 이런 놀이터는 처음 봤다.
저 꼴을 보아하니 나를 놀이터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하긴 누가 이 12시 야밤에 놀이터에 사람이 있다 생각하겠는지... 가로등은 약이 다됐는지 깜빡거리고 바람도 안 부는데 옆 그네가 흔들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귀신이 있을리가 없다.
그래 귀신이 있을리가 없다. 괜히 소름이 돋으려한다. 저기에 서있는 저 검은 그림자도 귀신이 아닐 것이다. 헉, 혹시 범죄자라든가 살인마라면? 내가 놀이터 연쇄사건에 시작이 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손에 땀이 차 글 쓰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그림자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기 시작한다. 이게 나의 유품이 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일기에 적힌 글들이 너무 구질구질해서 나 자신도 다시 보기 힘든데 다른 사람이 읽는 건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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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내 앞에 서자 꽥하고 소리 질렀다. 걔도 소리 질렀다. 저번에 그, 내가 담을 넘던 날 봤던 놈이었다. 슬슬 서로가 귀신이나 살인마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겁 먹었던 과거의 자신이 쪽팔려 둘이 서로 할 말을 못 찾고 눈만 꿈벅거리고 있자 하늘도 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고 싶었는지 대차게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내가 가방을 챙겨 놀이터 구석에 있는 정자 밑으로 들어가자 남자애는 잠깐 어리바리 까더니 우물쭈물 날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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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부터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저러다가 내 구렛나루에 큰 땜빵이 뚫리지 싶다. 근데 내가 자기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눈에 띄게 흠칫하며 고개를 돌린다. 어이가 없다. 자기는 날 신물나게 보고 있으면서 나는 못 보는지.. 서로 안면은 터야 되지 않나? 고개를 어쩜 저렇게 세게 돌리는지 머리카락이 붕 떴다 내려앉을 정도다. 목도 뻐근할텐데... 참 열심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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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만 꿈벅거리고 있었는데 어느새 잠 들었나보다. 말 그대로 눈 감았다 뜨니 해가 떠있었다. 더 이상 시선이 안 느껴진다 했더니 내 앞에서 끈질기게 쳐다보고 있던 남자애는 가고 없었다. 참새들이 정자 주변에 와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걸 잠시 멍하니 보다 몸을 일으켰다. 몸 위에 뭐가 덮어져있는지 가볍지만 무게감이 느껴졌다. 나한테 자기 옷을 덮어주고 갔나보다. 얇아서 이불 구실도 못할 하복 셔츠였다. 명찰에는 ‘이동혁’ 이라 적혀있었다.
내일 등교를 어떻게 하려고 나한테 이걸 덮어준건지 모르겠다. 콧물이 나와 코를 훌쩍였다.
2018년 8월 24일 수요일 날씨 : 은근 맑음.
집에 가서 1시간이라도 제대로 자고 나온다고 들어간 건데 눈을 뜨니 10시였다. 눈 앞이 핑핑 돌았고, 이마는 펄펄 끓었다. 감기였다. 이 한창 더운 8월에 감기가 왜 걸리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동안 잘 먹지도 않고 놀이터에서 맨날 밤을 지새웠다 치지만 개도 안 걸리는 여름감기를 걸리는 건 너무했다. 이젠 신이 미워졌다. 신의 존재를 믿지는 않지만 탓할 대상이 필요했다.
질병결석이 성립하려면 병원에 가서 보건증을 끊어와야 했지만 귀찮았다. 사실 힘들다에 더 가까웠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졌고, 이마는 펄펄 끓었다. 집에 있는 타이레놀을 먹으려보니 빈속이라는 걸 깨달았다. 찬장에 있는 컵라면을 꺼냈다. 커피포트에 물을 담고 끓기를 기다리는데 머리가 핑 돌아 쓰러질 거 같아 냉장고에 머리를 기댔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냉장고 안에 머리를 넣고 식히고 싶었다. 펄펄 끓는 기차 엔진 같았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폭주기관차 같았다.
예전부터 라면만 먹으면 속이 얹혔다. 꼬불꼬불한 면이 내 식도와 위를 꼬아놓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게 컵라면 말고 다른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 픽 죽어버리고 싶지는 않아 라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억겁과 같던 시간 3분을 떠나보내고 젓가락으로 라면을 들자마자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나왔다. 국물을 싱크대에 내려 보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쳐넣었다. 좁은 집 안에 라면 냄새가 가시지 않았다.
콧구멍에 휴지를 돌돌 말아 박고 방 안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완전한 대자는 아니었다. 좁아터진 자취방인지라 팔을 완전히 피면 서랍장에 막혀 제대로 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늘려 까딱대며 장난을 치다 옷걸이에 걸린 셔츠로 눈을 돌렸다. 이 동 혁. 명찰에 새겨진 이름 석자가 눈이 시리도록 잘 보였다. 저거 전해줘야 되는데, 등교는 제대로 했으려나. 저 셔츠에 뭘 묻힌 건 아니었지만 뭔가 세탁을 하고 줘야할 것 같았다. 축축 처지는 몸을 이끌고 베란다로 향했다. 딱히 다른 빨래가 없어 셔츠만 넣고 빨았다. 세제를 넣을 때 재채기가 나와 몸이 앞으로 쏠려 왕창 넣어버렸다. 학교에서 세제를 너무 많이 넣으면 더 깨끗해지기는커녕 제대로 빨래가 되지 않는다 했던 거 같다. 셔츠위에 수북하게 쌓인 하얀 가루를 외면하고 동작 버튼을 눌렀다.
2018년 8월 25일 목요일 날씨 : 맑음.
이동혁한테 셔츠를 전해줘야 했다. 날씨가 푹푹 쪄서 그런지 셔츠는 금세 말라 텁텁한 세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싸구려 냄새였지만 괜찮았다. 페브리즈를 뿌려서 주면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우리 반 반장한테 이동혁이 몇 반이냐 물으니 뭐지하는 얼굴로 우리 반이라 답해주고는 어디에 있는지 손수 손가락으로 가르켜줬다. 네댓명한테 둘러싸여 깔깔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2018년 8월 26일 금요일 날씨 : 엄청 화창함
눈을 뜨니 5시였다. 집에는 나 밖에 없었다. 형은 어젯밤에 안 들어온 모양이다. 한참을 방안에서 뒹굴거리다 할 일이 없어 7시에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학교까지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라 7시 10분에 정문 앞에 도착했다. 자리에 앉아서 창 밖만 멍하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조회가 끝나있었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몽글몽글하고 새하얬다. 햇빛때문인지 눈이 아파 깜빡이며 고개를 위로 들었다. 교실 천장을 보였다. 50년도 더 된 학교라 회칠이 벗겨져 있었고, 바꿀 때가 됐는지 전구 끝 부분이 검게 타있었다. 전구의 수명이 내 수명과 비슷해보였다.
3교시와 4교시 사이 쉬는 시간이 되자마자 가방을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힐끔 힐끔 쳐다보는 아이는 많았지만 어딜 가냐고 물어보지는 않았다.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다 나하고 눈이 마주치면 피해버리는 꼴이 같잖았다.
담임은 금연 껌을 씹으며 당구채로 등을 긁고 있었다. 때리지도 않으면서 저걸 왜 들고 다니나 의문이었는데 저렇게 쓰고 있었다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미간을 폈다. 조퇴를 하고 싶다 말하자 담임은 나를 한번 슬쩍 보더니 펜을 꺼내들었다. 고2인데 언제 까지 이럴거야, 물론 니가 어떻게 사는지 내 알바는 아니다만 그래도... 가끔씩 고개 끄덕거리며 그냥저냥 반응을 해줬다. 작게 한숨을 쉬곤 주위를 돌아봤다. 저 맞은편에서 이동혁이 국어 선생님과 대화중이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아는 척할 새도 없이 이어지는 담임의 잔소리에 다시 눈을 내려깔았다.
말이 점점 길어졌다. 말이 쌓여가기 시작하더니 주체못할 정도로 불어나기 시작했다. 발을 작게 구르다가 교무실 저편에 있는 시계를 슬쩍 봤다. 쉬는 시간이 2분밖에 남지 않았지만 할말은 아직 한참 남아보였다.
담임이 한숨을 쉬더니 드디어 조퇴증에 글씨를 끄적여주기 시작했다. 약 7분만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쉬며 천장을 봤다. 다시 바닥으로 고개를 내리던 중에 이동혁과 눈이 마주쳤다. 나를 계속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누구 하나 피하지 않고 서로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조퇴해? 입모양으로 묻길래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아픈거야? 입술을 앙 물고 살짝 고개를 내려까는 걸로 답을 했다. 긍정으로 알아들었는지 부정으로 알아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다시 고개를 드니 이동혁은 풋하고 웃음이 터진 걸 참고 있었다. 괜히 코 끝이 간지러워 손가락으로 코를 문댔다. 걔가 뭔 말을 더 하려던 찰나에 담임이 날 툭툭치며 갈 거면 빨리 가라며 조퇴증을 건네줬다.
교무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뒤를 돌아봤다. 이동혁은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냥 무시하고 나가면 되는 걸 왜 한참동안 보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이번에도 내가 먼저 시선을 옮겼다. 문을 쥔 손에 힘을 주고는 옆으로 밀었다.
2018년 8월 27일 토요일 날씨 : 약간 추움.
토요일 날 집에서 눈 붙이기를 기대하는 건 헛된 희망을 품는 것과 같다. 다른 사람들은 이게 무슨 개소리냐 하겠다만 나한테는 그랬다. 역시나 형은 오늘 친구 한무더기를 데려왔고, 친구들 양손에는 캔맥주가 가득 든 봉지가 들려있었다.
미리 챙겨놨던 가방을 매고 캡모자를 썼다. 신발 뒷창을 꾸겨 신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오늘도 어지럽혀진 신발장이 나를 배웅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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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1시, 보통 같으면 나 혼자 그네에 기대 눈만 꿈뻑이고 있을텐데, 오늘은 달랐다. 이동혁이 옆 그네에 앉아 쉬지도 않고 말을 걸고 있었다. 재민아 그거 뭐 쓰는거야? 재민아 너 핸드폰 번호 주면 안돼? 너 페이스북 안 해? 아니 너 쳐봐도 안 나오길래. 말이 꼬리를 달고 또 그 꼬리를 물고 다른 말이 나왔다. 사람이 뭐가 그리 궁금한게 많은지 모르겠다.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아는지 재민아, 재민아, 재민아. 평생 들을 내 이름 다 들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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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그렇게 떠들다가 갑자기 아무 말도 하지 않길래 뭐지하고 고개를 돌려 보니 이동혁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쟤는 얼굴을 봐도 꼭 내 눈을 봤다. 다른 이목구비 다 냅두고 눈만 봤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정적을 깨고 이동혁이 입을 열었다. 재민아. 이 시간에 여기에 왜 있는거야? 어떻게 말 해야할지 몰라 대답을 망설였다. 우리 형이 술을 좋아해서? 잘 살고 있는 형의 공간에 내가 침범해서?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계속되는 정적 속에서도 이동혁은 날 기다려줬다.
기다려준 만큼 만족스러운 대답을 주지는 못했다. 어쩌다보니, 이 짧은 한 마디가 한참을 짱구를 굴려서 낸 대답이었다. 그 뒤로도 시덥잖은 대화만 이어졌다. 어디 사는지, 형제는 있는지. 이동혁은 내 반응이 시큰둥해도 좋은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이동혁이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너랑 친해져서 좋다 였다. 뭐가 그리 좋은지도 모르겠고, 딱히 친해진지도 모르겠지만 딱히 반박은 하지 않았다.
2018년 8월 29일 월 날씨 : 약간 구름.
오늘은 미끄럼틀에 기대 누워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지만 누군지 뻔했기 때문에 굳이 상체를 일으켜서 누구야를 외치는 정도로 까지 확인하지는 않았다. 꿀렁꿀렁한 미끄럼틀에서 이리저리 낑낑대며 찾아낸 최고의 자세를 망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발자국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다 낡아빠진 mp3를 만지작거려 음악 세기를 키우고는 귀에 이어폰을 꾹 눌러넣었다. 이동혁이 소리를 지르며 내 앞에 불쑥 나타났다. 한숨을 쉬자 이동혁은 머쓱한 듯 웃었다. 아직도 쭈구려 누워있는 나를 흔들며 일으켜 세운 이동혁은 나에게 검은색 봉지를 쥐어줬다. 열어보니 온갖 과자와 주스로 가득 차 있었다. 한 쪽 이어폰을 빼고 이게 뭐냐고 타박하려 고개를 들자 입꼬리가 귀에 걸릴 듯이 웃고 있는 이동혁이 보였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왜 생긴건지 이해가 간다. 내 반응을 기대하는 낯에 이걸 왜 나한테 주냐고 타박하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당황해하는 날 보던 이동혁은 모자를 벗고 머리를 매만지며 오늘 밤은 같이 있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말했다. 나랑 일년을 이렇게 본 것도 아니고 끽해봐야 사흘쯤 놀이터에서 만난 건데 책임감을 느끼나보다. 잠시 과자봉지를 들여다 보다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이동혁은 저 멀리 사라진 후였다.
2018년 8월 30일 화 날씨 : 맑음
오늘 형이 외박을 했다. 아침 등굣길에 문을 나서는 내게 잠에 취해 웅얼거리며 오늘은 집에 없을 것이니 너가(내가) 알아서 하라고 말했다. 누가 보면 평소에 되게 신경써준 줄 알겠다라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오늘은 그냥 집에서 선풍기 바람 쐬며 누워있으면 되는 날이었다. 집에 들어오니 형이 아침에 누워있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냥 거기에 쏙 들어가 잠만 자면 됐다. 그런데 자꾸 이동혁이 눈에 밟혔다. 오늘 놀이터에 나왔으면 어떡하지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서랍장을 의지해 바로섰다. 몸은 집에 붙어있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머리는 꿋꿋이 발에게 신발을 신으라했고, 손으로는 문 손잡이를 잡으라했다.
혹시나했는데 역시 이동혁은 그네에서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다. 가끔씩은 땅을 박차고 앞 뒤로 움직였다. 점점 그네에 가까워질 수 록 다가가는 내 발걸음이 느려졌다. 이동혁은 그네 앞에 서기 한참 전부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이동혁 앞에 서자 걔는 나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오늘은 내가 널 기다렸네. 해맑게 웃는 동혁이의 모습이 선명했다.
2018년 8월 31일 수 날씨 : 구름이 살짝 낌.
오늘은 날씨가 살짝 쌀쌀해 놀이터 구조물을 이어주는 터널같은 통로 안에 들어와있다. 바닥에 담배꽁초가 군데군데 깔려있기는 하지만, 바람을 막아주니 다행이다. 저번처럼 여름감기에 걸리고 싶지는 않다. 오한이 들어 바느질 이음새 사이로 깃털이 삐져나오는 오리털 이불을 꺼내 덮었다. 그런데 지랄 맞은 몸은 이불을 덮으면 덥다고 땀을 뽑아냈고, 걷으면 춥다고 온 몸의 털을 세웠다. 땀을 뻘뻘 흘리며 간접 사우나 체험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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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에 기대 가만히 발가락만 꼼지락 거리다 잠이 와 눈을 감았다. 눈 떠보니 어떤 검은색 덩어리가 내 맞은편에 있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난 소리 지른 내 자신이 쪽팔리지 않다. 그럴만 했다. 이동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올 블랙으로 깔 맞춰 입은 상태였다. 검은색 캡 모자, 검은색 무지티, 검은색 찢청, 검은색 스니커즈였다. 하양색은 칼국수면같은 신발끈 단 하나였다.(이동혁은 핸드폰, 케이스 모두 검정색이었다.) 게다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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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따라 이동혁이 조용하다. 이건 조금 큰 문제다. 이동혁은 항상 내 옆에서 입을 나불대고 있었다. 물론 내가 이동혁의 몇년지기 친구도 아니고, 기껏해봐야 얼굴 한 5번 본 사이고, 전화번호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동혁이 내게 보여준 모습이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동혁에게 무슨 일이 있는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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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이동혁이 슬쩍 눈물을 훔쳤다. 그러면서 내 쪽을 흘깃대는게 은근히 물어봐주기를 원하는 눈치인 거 같다. 큰 일은 아닐지 쪼끔 걱정된다. 진짜 쪼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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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망한 거 같다. 좀이 아닌가, 많이 망했다. 시작은 평범했다. 왜 우냐고 단 한 마디 했다. 동혁아, 무슨 일 있어?도 아니고 정말 그냥 무뚝뚝하게 왜 우는데, 라 했을 뿐인데 이동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오늘 엄마가 어쩌구저쩌구, 동생은 또 어떻고 걔가 나한테 먼저...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는 걸 들어주려니까 힘들었다. 열변을 토해는 얼굴에 눈물 자국이 적나라해 몇 번 맞장구를 쳐줬다. 내가 왜 그랬지?
아 진짜 너무하다니까, 너무했네. 맨날 나만 갈구고 내 얘긴 듣지도 않고. 와, 나빴네.. 이런 식으로 그냥 끝 말을 반복하며 조금 맞장구 쳐줬다. 잠깐 멍 때리고 있었을 뿐인데 이야기의 방향이 거기로 향했는지 몰랐다. 대화의 흐름이 거의 북한과 미국의 관계 같았다. 어디로 튈지 알 수가 없다.
바다가고 싶다. 그래 가고 싶네. 헐 재민아 우리 바다 보러갈까? 보러갈까? 아차했다. 내가 말하고도 깜짝 놀라 이동혁을 보니 장화신은 고양이가 올려다보는 것 처럼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혁은 나한테 애원했다. 제발 진짜 재민아 제발 나 친구도 없어서 같이 갈 사람이 없어. 거짓인게 뻔한 구라를 쳤다. 학교에서 볼때마다 친구에 둘러싸여있던 사람이 저런 말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왜 내가 지금 짐을 챙기고 있는거지? 화남과 동시에 내 자신에게 어이가 없다. 뭔 개소리냐고 부산 안 간다 했어야지.. 거절하려면 저 때 거절하면 됐다. 니 얘기를 제대로 안 듣느라 말을 잘못했다 하면 되는 걸 왜 못 말해서 책가방에서 책과 필통을 빼고 옷가지를 집어넣고 있는지 모르겠다. 근데 이렇게 툴툴대고 있으면서 짐은 착실하게 싸고 있다. 모르겠다. 오늘 기분이 좋은가? 하루가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느낌이다. 내가 주도하는게 아니라 뭔가에 끌려가고 있다. 뭐에 끌려가는지 몰라서 기분이 더럽다. 그런데 기분이 들뜬다. 모르겠다. 나도 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꼴에 여행이라 그런가? 이동혁이랑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10분 남았다. 첫차를 타고 갈 거라 빨리 나오라고 했다. 이제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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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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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일 목요일 날씨 : 쨍쨍함.
내가 더위를 먹었나보다. 아니고서야 이런 미친 짓을 할리가 없다. 이동혁은 옆 자리에서 내 좌석까지 침범해 내 어깨에 기대 자고 있다. 침은 안 흘린다. 그렇지만 코는 곤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이동혁은 자기 몸만한 가방을 들고 왔다. 경악을 하며 거기에 대체 뭐가 들은 것이냐 물으니 걘 우쭐대는 표정으로 가방 지퍼를 열었다. 그 큰 가방을 빈틈도 없이 꽉꽉 채워왔는지 지퍼를 열기도 힘들었다. 진짜 이동혁은 미친 놈 같다. 가방은 아디다스 바지 2개, 반팔티 3개,, 그리고 과자로 채워져있었다. 걔만한 가방이 거의 과자로 꽉 채워져 있었다는 건 정말 진짜 부산가서 과자만 먹으려하는 거 아닌가? 돈은 어딨냐고 물어보자 자기 바지 주머니를 톡톡 치며 자기를 똘추로 보냐는 말에 긍정을 표하려다 말았다. 얘네 집이 과자 공장을 하는건가.. 진짜 이동혁은 미친놈이다. 동그란 머리에 꿀밤이라도 놔주고 싶다. 좀 많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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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떠보니 이동혁은 자기 가방에서 과자를 꺼내 먼 허공을 바라보며 애처로운 얼굴로 씹고 있었다. 먹는게 아니라 씹고 있었다. 너 표정이 진짜 똥 씹은 얼굴이라 하니 이동혁은 그리운 사람이 있어서 라고 했다. 감성에 젖어서 창문을 보는 꼴에 쯧쯧 혀를 차다 누가 그리 그립냐고 물어봤다. 내 옆에 있는 또라이는 우리 쁘띠큐띠한 코코가 집에 있잖아...라며 눈가를 훔쳤다. 코코가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자기 강아지라 답했다. 종은 푸들이고 갈색 강아지에 사는 곳은 닌텐도ds라고도 덧 붙였다.
진짜 이동혁은 미친놈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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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소원인 바다에 왔다. 이번 여름은 9월까지 폭염이 지속돼서 그런지 아직 사람이 좀 있었다. 이동혁에게 안 들어가냐 물어보니 수영을 못 한다고 했다. 자기는 맥주병이라 물에 못 뜨고 들어가는 거만으로도 무섭다고 했다. 그럴거면 바다에 왜 온거지? 최소한 발이라도 담가볼 줄 알았다. 얼빠져 이동혁 얼굴을 보고 있자 이동혁은 헤헹하며 웃었다. 쳐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도 없었다. 얜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그래도 자기는 꼭 해보고 싶은게 있다며 가방을 뒤지기 시작하더니 새우깡을 꺼냈다. 자기는 꼭 갈매기를 배불리 먹여주고 부산을 뜨겠다며 벌떡 일어나 갈매기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아주 마더 테레사 납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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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기에 저건 먹여주는게 아니라 뜯기는 거 같다. 이동혁이 쪼끔 불쌍해졌다. 아니지, 아까 이동혁을 생각하니 열이 뻗쳐서 불쌍한 마음이 싹 사라진다. 기차표를 끊을 때 바다를 보고 싶으면 그래도 가까운 인천을 가자는 나한테 뭘 모르는 놈 취급하며 바다는 부산이지, 라며 풉하며 비웃었다. 다시 생각하니 진짜 때리고 싶다. 갈매기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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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혁의 새우깡이 바닥을 보이자마자 갈매기들은 미련도 안 남은 듯 옆을 떠났다. 내 쪽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이 너무 처량해보여 웃었더니 이동혁은 뭐가 그리 좋아 웃냐 빽 소리를 질렀다. 나도 뭐가 그리 좋은지 모르겠다. 그냥 웃음이 났다.
이동혁도 날 따라 웃기 시작하더니 내가 웃는 건 처음 봤다라고 했다. 뭐라 대답해야될지 몰라 모래만 만지작거렸다. 아무 말이 없자 이동혁이 내 눈치를 보더니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옆에 착 붙었다. 굳이 쳐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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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를 찾는데 한 3시간은 걸린 거 같다. 내 다리와 구글 지도의 합작이었다. 9월초의 부산은 완전 성수기는 아닌지라 꽉 차지는 않았지만 늦게 휴가를 오는 피서객도 어느 정도 있었다. 가격도 성수기와 비수기 중간쯤이라 딱히 싸지도 않았다. 숙소도 잡지 않고 여행을 오는 건 정말 멍청이중에서 멍청이중에서도 또라이만하는 일이었다.
한참을 골목의 골목을 타고 가 어떤 여관 집에 들어갔다. 건물 전체가 여관인대 입구는 담배꽁초가 늘어져 있었고, 주인 할아버지는 귀가 먹었는지 우리 얘기를 잘 못 알아들었다. 3번은 말해야 반을 알아들었고, 5번을 말해야지 전채를 이해했다. 여관 내부는 정말 여관다웠다. 장미 무늬 벽지에 한 구석에는 두께가 거의 내 몸통만한 티비가 있었고, 선풍기 날개부분이 누렇게 변색돼 덜덜거리는 선풍기 밖에 없었다. 에어컨이 없었다. 욕이 나온다.
이동혁은 돌아다니고 싶은 곳이 더 있는 했지만 난 아니었다. 다리에 감각이 없었다. 선풍기 앞에 자리 잡아 헥헥대고 있는 나를 보던 이동혁은 내 다리를 베고 드러누웠다. 다리가 끊어질 거 같아 밀어냄에도 끈질기게 붙어오는 얼굴을 밀어낼 힘이 없어 포기했다. 그것도 잠시 살이 맞붙으니 뜨거워 베개를 베고 누우라 신경질을 냈더니 이동혁은 쭈구리가 돼 날 등지고 누웠다. 저거 삐진 거 아닌지 걱정된다.
탈탈탈 곧 터질 듯이 돌아가는 선풍기만 멍하니 보고 있다 옆을 보니 이동혁이 날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뭘 보냐고 틱틱대니 니얼굴이라는 1차원적이고 유치한 대답을 받았다. 헛웃음이 나와 웃으니 이동혁도 따라웃었다. 내가 정색을 하니 따라 정색을 했다. 동글동글한 얼굴을 잠시 노려보다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2018년 9월 2일 금요일 날씨 : 진짜 죽고싶다.
오늘 날씨는 정말 나갈 날씨가 아닌 거 같다. 진짜 아니다. 이 날씨에 이곳저곳을 다니며 여행을 한다? 피부에 3도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이건 좀 과장이 섞여있지만 그랬다. 너무 더워서 지금 깼다. 새벽 5시다. 깬지 안돼서 횡설수설인 와중에도 날씨를 기록하려는 내 진정성이 텍스트에서 느껴진다. 방금 날씨 칸에다 진짜 덥다라 썼다가 지우고 죽고싶다라고 썼다. 진짜 죽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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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풍기에 머리를 박고 헥헥 대고 있는데 옆에서 코까지 골며 자고 있던 이동혁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어제 나보다 늦게 잔 거 같다. 어렴풋이 내 옆에서 뿅뿅하는 게임소리가 들렸던게 기억이 난다. 과자를 먹고 잤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어딘가에 홀린 귀신처럼 화장실로 향하길래 저 놈이 미쳤나 했는데 샤워를 하러 간 모양이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수건이 없다고 찡찡대길래 알아서 말리고 오라고 소리쳤다.
2018년 9월 3일 토요일 날씨 : 사람이 더위먹고 죽을 수도 있겠다.
더 이상 여기서 지낼 수 없다. 화성하고 지구하고 자리를 바꾼 듯한 날씨였다. 이 날씨에 에어컨 없이 자기는 무리였다. 내가 잠을 잤는지 눈을 감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일 다른 숙소를 찾지 못하면 난 나 혼자서라도 차 끊어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이동혁한테 통보했다. 이동혁이 난 아직 부산의 반의 반도 못 봤다고 찡찡대며 달라붙는 걸 다른 숙소를 잡으면 되지 않냐며 밀어냈다. 아, 하며 수긍하는 얼굴이 바보같았다.
아침에 이동혁이 전화를 받을까말까 고민하는 걸 봤다. 엄마일까? 사실은 집에 가고 싶은데 나한테 못 말하는 걸지도 모른다. 분명 오자고 한 건 이동혁인데, 어느새 내가 더 웃고 있는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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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니는 대충 라면으로 때웠다. 난 도시락, 이동혁은 라면을 먹었다. 우리 엄마 카드로 긁는거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비싼 거 먹으라니까 어이없다는 듯이 날 쳐다보며 니 돈도 아니고 니네 어머님 돈인대 어떻게 상관을 안 쓰겠냐고 했다. 내 돈이면 걍 아무거나 쳐먹었을 거란 건가?
9, 4일 . 일요일
모르겠다. 지금 뭐지 어떻게 된거지? 우린 어떡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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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아니 내가 거기서 아니지 분명먼저 친건 그아저씨다. 나 때문에 괜히 동혁이가
9월 6일 화
피는 영화나 만화보다 더 붉다. 뭐로도 비유할 수 없는 색이다. 명치가 아렸다. 공중 화장실에서 씻는게 며칠째였다. 찝찝했다. 어디서든 샤워를 하고 싶었다. 동혁이가 말이 없다. 거울에 비친 볼이 붉었다.
2018년 9월 7일 수요일
우리는 다른 숙소를 찾기 위해 그동안 밀린 숙박비를 결제했다. 아니 하려했다. 수중에 남아있는 현금은 이미 다 쓴지 오래였다. 남은 건 엄마가 준 카드밖에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카드를 줬다. 카드를 정지시켜 놨을줄은 몰랐다. 전날에 편의점에서 엄마가 준 카드로 긁었었는데 엄마한테 카드 문자가 간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당연히 결제는 되지 않았고, 할아버지는 우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설명을 했지만 얘기를 듣지도 않고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카운터 밖으로 나왔다. 너네는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냐며 이렇게 옘병할 짓만 하는 거 보니 애미 없는 거 같다고 했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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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가 할아버지를 막았나? 이동혁이 밀었나? 재수가 없었다. 탁상 모서리에 뒷통수를 박았다. 바닥은 피로 넘쳤고 할아버지는 눈을 뜨지 않았다. 감히 몸을 흔들어 죽었는지 확인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어 112를 눌렀다. 신호음이 끝나고 경찰이 무슨 일인지 물어봤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되지? 할아버지가 죽었어요,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도 모르겠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거 같아요 아깐 소리라도 지른 거 같은데 지금은 모르겠어요. 소리낼 수가 없었다. 입만 벙긋하고 있는데 이동혁과 눈을 마주쳤다. 마주친 눈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도망쳐야한다. 갈 곳이 없어도 계속 걸어야한다.
2018년 9월 10일 토요일
이동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근 4일 만이었다. 나한테 자기 삼촌 집으로 가자 했다. 거기는 섬이어서 잡으러 오기도 힘들고, 티비 있는 집도 별로 없어 우리 상황을 모를 것이라 했다. 동혁이에게 물었다. 그 다음에는. 도망친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건데, 거기서 공소시효 끝날 때까지 살거야? 너가 여기 오자고만 안했어도. 미친듯이 말을 쏟아냈다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고 나오는 대로 뱉어내다 이동혁을 봤다. 검정색 캡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이 상황이 익숙했다. 모자에 가려진 눈은 붉어져있겠지, 동혁이에게 미안하다 말했다. 그 말이 그대로 나한테 돌아왔다. 물기 섞인 목소리였다.
2018년 9월 12일 월요일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고속버스를 끊었다. 기차는 사치였다. 섬은 배를 타고 한참을 들어가야 했다. 동혁이가 둘 다 뱃멀미가 없어서 다행이라 말했다. 이 상황에서 다행인 순간이 존재하나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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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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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13일 화요일.
형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학교는 어떻게 하고 왔냐고 물어볼 만도 했지만 그냥 동혁이에게 그동안 뭘 하고 지냈길래 이렇게 말라비틀어졌냐고만 했다. 그 말을 듣고 이동혁 얼굴을 다시 봤다. 처음 봤을 때 보다 야위었고, 다크서클은 볼까지 내려와있었다. 그 얼굴에 담긴 무게를 짐작할 수가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내 얼굴도 별반 다르지 않을텐데 왜 유난이었는지는 모른다.
2018년 9월 14일 수요일 날씨 맑음.
형은 우리가 방 안에만 늘어져있는 걸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는지 바닷가로 산책이라도 다녀오라며 우리를 내쫓았다. 바닷가에 앉아 파도가 모래를 적시고 빠져나가는 모습을 멍하게 보고만 있었다. 동혁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새우깡이 없어서 아쉽다고 하길래 갈매기들한테 물어뜯길 일 있냐 했더니 푸스스 웃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웃음소리였다. 힘없이 늘어져있는 팔에 팔짱을 꼈다. 어깨에 기대고 눈을 감으니 이동혁도 내 머리에 기대고는 작게 읇조리듯 말했다. 내가 미안해. 전부터 뭐가 미안한지 모르겠다. 넌 잘못한게 없으면서, 왜 자꾸 미안해하냐 물으니 그래야 될 거 같아서 라는 답을 받았다.
넌 안 그래도 된다고 말했다.
2018년 9월 15일 목요일 날씨 흐림.
형이 집에 들어오시면서 술 한 보따리를 사들고 오셨다. 그걸 다 혼자 드실거냐 물으니 뭔 소리냐며 너네랑 같이 먹을거라 하셨다. 우리가 18살인 건 아냐 물으니 그 정도면 맥주쯤은 마셔도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혁이는 1학기 때 수학여행에서 딱 한번 먹어봤다고 했다. 소주 5병을 놓고 5명이서 마셨는데 다른 애들 다 드러눕고 두 명이 남았는대 한 명이 자기었다 했다. 자긴 하나도 안 취하고 멀쩡했단 얘기도 덧 붙였다. 그저 웃었다. 이동혁 구라가 늘었다.
2018년 9월 16일 금
어제 무슨 말을 오갔는지 기억이 안 난다. 동혁이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했다. 형은 아침일찍부터 어딜 가셨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이동혁이 화장실에서 구역질하는 소리 때문에 일기 쓰는 데 집중하기가 힘들다. 자기는 술 세다고 입 턴게 얼만데 저렇게 무너지다니.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마침 콩나물이 있었다. 콩나물국이라도 해 먹여야지 저 난리를 멈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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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고요한 상담실에 일기장을 덮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상담사의 시선은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며 얘기를 한다. 재민아, 일기에 삭제된 부분이 너무 많아서 증거로 채택되기엔 너무 어렵대. 너가 직접 말을 해줘야지 동혁이가 감형 돼.
지금 동혁이는 자기가 혼자 다했다고 말하고 있어서...
눈을 질끈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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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없었던 형은 육지에 다녀왔다 말했다. 식재료를 사러 갔다고 했지만 아침에 열어본 냉장고는 온갖 음식으로 꽉 차 있었다. 말하면서도 우리 눈을 마주치지 못했었다. 우리는 형을 믿었지만, 형에게 우리는 살인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형의 눈을 피해 집에서 나갔다. 코딱지만한 섬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딘가 싶었지만 그래도 뭐라도 해야 됐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뛰었지만 우린 이미 경찰의 손바닥 안이었다.
2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경찰에게 들키고 말았다. 죽을 힘을 다해 뛰었지만 숨을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았다. 경찰이 뒤에 있는지 계속 힐끗힐끗 거리다 발을 접질러 넘어지고 말았다. 나를 일으켜 세우던 동혁이가 멈칫하더니 한걸음 물러났다. 뭐하냐고 다그치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살아야 된다고, 이거 다 내가 부산 오자고 해서 벌어진 일이니까 내가 다 책임 지겠다고 했다. 내가 다 했다할테니까 넌 나 잊고 잘 살라고 말하는 걸 계속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개소리 말라고 했다. 이게 왜 다 네 탓이냐고 말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입만 벙긋거렸다. 마주친 눈동자는 굳건했다. 이동혁이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사랑해. 목이 매어 대답을 하지 못했다.
너가 멀어졌다. 천천히 멀어져 가는 손을 잡지 못했다. 소리쳐 부르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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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끈 감았던 눈을 다시 떴다. 넌 내 옆에 없었다. 내 시야 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쥐고 있던 손을 펴봤다. 피는커녕 작은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엄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