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單愛
제제
아, 그 형은 좆같게 미련하고 멍청했는데, 생각해보니 그건 나라고 다를 게 없었다. 어, 낭만에 미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질질 울며 일상을 망치는 구질구질한 인간들. 그게 나재민이고 또 나였다. 애정이 고픈 건지 사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렇게 결핍된 사람은 아닌데, 왜 나재민은 예외인지, 왜 나재민을 사랑하는지, 왜 우리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 사랑하고 있는 건지. 의문은 더해가고 타인의 감정을 배제하는 날이 늘어난다. 나는 한심해서 그렇게라도 내 감정을 버리고 싶었다. 고작 사랑 때문에 내가 한심하단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순전히 남 탓이다. 나를 봐주지 않는 나재민 탓.
單愛
박지성 나재민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키웠다. 초등학생 때 어디선가 구해온 사탕 따위를 작은 손으로 쥐어주던 그 때나, 나를 업고 집으로 가는 언덕을 오르던 형의 작은 등, 그때도 좋았고. 나는 아직 중학생인데 벌써 저만큼 커버려서 졸업장을 쥐고 환하게 웃던 그 얼굴, 순간적인 서러움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눈물을 뚝뚝 흘리자 당황해서 내 온몸을 조심스레 껴안아 주던 따듯한 품. 주말에 같이 먹던 저녁밥, 긴 속눈썹, 내 고등학교 입학식에 잔뜩 설레어하던 표정이나 그 이외에도 자잘한 다정함. 사실 그리 대단한 곳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는데 정신 차리고 보니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감정에 빠져 그 안에 기생하고 있었다. 형이 무심코 웃어줄 때 가슴께가 간지러워서, 나도 모르게 재채기를 해놓고 봄이 왔구나 했으니까.
형은 자주 나한테 귀엽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낯 간지런 말을 속삭였다. 내 볼을 꼬집기도 했고, 연인 행세하는 마냥 날 안기도 했고, 내 어깨에 그 손을 올려둘 때면 심장이 멈추고 어지러워 더운 숨을 내뱉었다. 착각은 쉬워 종종 형의 생각을 왜곡할 때면 사랑이 격해져 주먹을 꽉 쥐고 붉어진 뒷목을 감쌌다. 형은 모르는 건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내 옆에 앉아 빙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정확한 긍정도 부정도 없어서, 노골적인 애정에 금방 허물어지는 나로선 애매한 간극에 전전긍긍하기만 했다. 그래도 혹시, 어쩌면, 그럴 수도 있잖아 같은 희망적인 말로 나를 위로하고 나면 지치지도 않는지 형을 더욱 사랑하고 말았다. 정말 어쩌면 형도 나를 좋아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럼 그때에 터져버린 내 심장을 고백하고 싶어서. 만약 지금까지 내게 한 행위가 나를 좋아해서 그런 거라면, 나 역시 이보다 더 큰 애정을 전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나는 전부터 형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다고 알려주고 싶어서. 못 전한 말이 많으니 형은 나를 사랑해야만 했다. 그래야 뒤숭숭한 머릿속이 조금 진정되고, 잔뜩 엉켜 응어리진 가슴이 나아질 것만 같았다. 감정을 초월한 곳에서 진심이 나올 때면 나도 모르게 꿈에선 형이 나왔고, 우리는 그 안에서 절절하게 몸을 부대끼며 나는 그 손마디 하나하나에 입술부터 묻었었다. 아침이 오면 자주 멀미가 나는 것 같았는데.
애초에 불리한 관계였지, 내 전부를 아는 사람의 그림자조차 밟아본 적 없다는 게.
형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 말했고, 이상하게 나 자신이 생각보다 담담해서 당황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냥 익숙해진 것일 수도 있다. 나는 원래 나 혼자서 자의적인 사랑을 해왔고, 생각해보면 내 사랑에 형의 의사를 넣은 적 있었나? 아무한테도 털어놓은 적 없이 때때로 설레어하며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한 건 순전 나뿐이었다.
“ 어떤 사람이에요? ”
그런데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 나보다 한 살 많아. 되게 다정하고……,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어줘. ” 티 나게 안심한 목소리에선 수줍음이 가득했다. 커피 잔을 문지르는 손을 눈에 담고 그림자가 드리워진 속눈썹은 예쁘게 휘어진 눈꼬리를 따라 살랑였다.
“ 그……, 잘 될 거예요. ”
“ 고마워. ” 선홍색 머리칼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어느덧 꽃이 만개한 봄이었다. 그래, 봄이 왔구나, 했었지.
평소와 다름없이 형과 저녁을 먹고 또 나를 데려다주고 현관 앞에서 헤어지며 오늘도 내 하루에 제일 많은 개입을 한 사람은 형이고, 난 그걸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는데 어제와 한 달 전과 일 년 전과 다른 건 하나 없으면서 내가 좋아하는 날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는데 어쩐지 꿈이라도 꾼 듯 온통 멍했다. 아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형을 배웅할 때 일순간 눈앞이 뿌예 형의 마지막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귓가는 꽉 막혀 모든 소리가 웅웅댔고, 감각은 무뎌지고, 턱은 자잘히 떨리고 숨 메인 목구멍에서 목소리는 나오지 않아. 분명 당황스러울 정도로 담담했는데 혼자 남은 방에서 가만히 앉아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룩 흘렀다. 지지리 궁상이다. 내 처지가. 십 년도 더 넘게 좋아한 상대에게서 고백 한 번 못 해보고 차였다. 울음을 참으려 입술을 꽉 물었는데 건조했는지 투둑 소리를 내며 비릿한 향이 확 퍼졌다. 아파. 쓰라려. 피 나온다구, 형 나 피나는 거 싫어하잖아, 나 지금 피난다고……. 큼지막한 눈물방울은 마르지도 않는다. 아무도 없는데 누군가가 지켜보는 느낌에 얼굴을 손에 묻고 한참을 진정했다. 열이 오른 얼굴이 더워 숨이 막혔다.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발끝까지 내려앉은 심장에게 다시 제 자리로 와주라며 사정할 때, 무심코 손바닥을 내려놓으니 비참할 정도로 잔뜩 젖었는데, 이젠 닦아줄 사람이 없는 거다.
그 사실이 나를 자꾸만 죽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나는 자꾸만 죽어갔다. 악착같이 진심을 피하고 부정하며 형이, 그러니까 나재민이, 나를 이렇게 만든 형이 나와 똑같이 힘들었으면 좋겠다고 딱 한 번 생각한 적 있다. 제정신 아니지, 마를 일 없는 베개를 붙들고 보고 싶은 얼굴을 생각하며 전화번호부를 뒤적이다 말았다. 쌓인 연락은 형이 제일 많았는데 예전의 나를 연기하기엔 내가 너무 모자랐다. 왜냐하면 형의 흔적에 손을 대자마자 두서없는 울음과 함께 토해내듯 진심을 자백할 것만 같았기에. 이렇게 죽도 못 쑬 거 곁에라도 맴돌고 싶어서 나를 죽이고 죽여 가며 피하고 있는 거다. 언제까지 좋은 형 동생을 연기할 수 있을까, 그전에 마음이나 접을 수 있을까. 미련해서 한참을 이러고 있는데. 쪽팔려 죽고 싶어 창피해 진짜. 퉁퉁 부은 눈꺼풀은 이제 아파 오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면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휴대폰엔 여전히 형의 번호가 떠 있었다. 나는 망설이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 지성아, 무슨 일 있어? 안 받아서 걱정했잖아. ”
“ 그냥……, 바쁜 일이 있었어요. 왜요? ”
와중에 목소리 들었다고 심장이 다시 엇박자를 타기 시작한다. 줏대 없는 놈.
“ 저녁 했는데 양이 너무 많아져서, 같이 밥 먹을까 하구, ”
“ 아, 형 죄송해요, 오늘은 좀. ”
“ 그래? 알겠어, 우리 지성이 밥 굶지 말고 내일 보자. ”
발랄한 전화가 끊기고 붉어진 귓가 따윌 손으로 잡아챘다. 진짜 미친놈. 중얼거린 소리는 유독 크게 울린다. 진짜 진짜 미친놈. 왜 이렇게 좋아서 죽을 일이야 이게. 당장에라도 뛰쳐나가 고백할 뻔. 오바, 진짜. 이런데 내가 좋아하지 않고는 못 배기지. 꼭 내가 자기의 1순위인 것처럼 대하는데, 어떻게 안 좋아하고 배겨. 내 첫사랑은 쉽게 접히지가 않았다. 정말 다정하고, 날 특별하게 대하는 사람. 사람이 좋아지는 이유는 변함이 없나 보다. 형은 꼭 형 같은 사람을 좋아하네. 만약 내가 쑥스러움이 줄어서 덜 틱틱대고 형한테 그랬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형도 날 좋아하게 됐을까? 내가 만약 티를 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 수도 있겠지. 내가 문제네, 그렇네. 벽에 이마를 쿵쿵 박아도 후회는 이미 늦어서 하는 거였다. 아예 생각 자체를 안 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을 거 같아. 아, 짜증 나. 왜 나재민이 좋아하는 사람은 내가 아니어서.
형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수줍게 웃을 형이 그려진다. 배알이 꼴린다. 형의 손을 맞잡을 손. 심기가 뒤틀린다. 형의 낭만을 모두 가져갈 그 사람이 너무 부럽고 질투 난다. 아랫배에서 검은 게 부글대며 솟구친다. 그걸 토해내고 싶다. 죄악인가? 아무렴 이것도 형에게 느끼는 감정일 뿐인데, 모조리 뱉어내고 싶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적어도 나에겐 이걸 컨트롤할 능력이 없다. 조금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럴 거면 차라리 형의 사랑도 짓밟혔으면 좋겠다고.
드는 생각은 정말 어쩔 수 없다. 이건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적어도 나에겐, 어쩔 수 없는 거다. 아무렴 이것도 형에게 느끼는 감정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근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이건 다 형이 울어서 그런다. 숨도 못 쉬고 얼굴은 발개져서 몸만 안쓰럽게 떠는 형을 봐버려서 그런다. 속에서 빨간 게 들끓는다. 도저히 혼자 둘 수 없게 만든다, 왜 혼자 섧게 울고 있는 거야. 가방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궁상맞게 가로등도 안 드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소리 없이 울 건 뭐람. 그렇다고 형을 모른 척 둘 수 없어서. 쭈뼛 다가가면 흐린 눈으로 날 올려다보는 형에 소름이 끼쳤다. 눈가를 꾹 누르며 눈물 자국을 가리며 잠긴 목소리로 인사하는 형이 낯설었다. 내가 형의 우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가? 알 수 없는 기분이다.
“ 왜 울어요. ”
“ 지성아, 형이 지금은 조금 그런데, 내일 다시 보자. ”
“ 됐어요, 일단 집 가요. ”
데려다 줄게요. 눈물에 뒤엉킨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힘없이 딸려오는 몸뚱이가 유독 가볍다. 알 수 없는 기분이다. 어딘가 찝찝해서 괜히 인상을 찌푸렸다. 잡힌 손목이 가늘었다. 살 빠졌네. 툭 도드라진 손목뼈가 손바닥을 날카로이 찌른다. 퉁퉁 부은 얼굴이 이상하게 이질적이었다. 분명 낯선 일인데 낯설지가 않다. 뒤돌아보면 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닥만 보며 지그재그로 걷고 있는 중이다.
“ 무슨 일이에요. ”
적막한 골목길은 읊조린 목소리도 쉽게 커졌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눈물방울은 조약돌이 되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비췄다. 입 안에서 수도 없이 굴리던 문장을 뱉었다. 형은 여전히 고개를 처박은 채였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요. 덧붙인 말은 진심이 아니다. 형은 눈가를 벅벅 닦으며 겨우 입 꼬리를 끌어당겼다. 그 모습이 지나치게 안쓰러워 숨이 턱 막혔다. 내가 처음 보는 형의 모습이다.
“ 형 생각도 해주구 다 컸네, 그런데 별 일 아니니까, 형 진짜 괜찮아. 늦었는데 들어가. ”
찝찝해! 떨떠름하게 알겠다며 발을 끌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 형을 돌아볼 때, 웃고는 있었는데. 그랬는데 형은 그 날 이후로 천천히 죽어 갔다. 왜? 정말 조용히 죽어 갔고, 그걸 진즉에 형은 알고 있었는데, 살고자 하는 의지도 잃은 채 혼자서 조용히 죽어 갔다. 형을 다시 찾았을 때 형은 미동도 없이 곤히 잠들어 있었는데, 나는 소름 돋은 팔을 갉작이며 형의 긴 속눈썹과 코와 얇은 입 꼬리를 찬찬히 뜯어봤다. 길게 뻗은 목과, 가지런한 손과, 죽어 가는 형을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 나의 발등은 굽어 갔고 문득 나는 죽고 싶었다. 형. 일어나요. 일어나 봐. 나재민. 일어나라니까? 손가락이 꺾이고 목 뒤에선 비늘이 돋는 것만 같았다. 나재민. 나재민. 나재민?
형?
지성아. 휙 돌아간 고개에선 더 이상 간지러운 느낌이 나지 않았다. 멀쩡한 손을 들어 제대로 남아 있는 열 손가락 마디 모두, 기괴하게 굽지 않은 발등까지 그대로였다. 형은 잠을 쫓으며 몸을 일으켰다. 급하게 다가가 형의 뺨에 손을 대었다. 아직 뜨겁다. 마르긴 했지만, 그래도 제 기능을 하는 몸은 썩지 않았다. 다행이다. 안도의 숨에선 물기가 서렸다. 마른세수를 했다. 나는 요즈음 자꾸, 이상한 꿈을 꾼다. 그건 대개 죽은 형을 바라보는 나이다. 좆같게도 생생해서 후유증은 항상 크다. 왜 이런 꿈을 꾸는 걸까.
그건 아마도 죄책감이 아닐까 추측한다. 죄악을 뱉어버린 대가.
형은 자주 울었다. 조용히 아주 오래 울었다. 나는 위로도 하지 못하고 그 옆에서 가만히 앉아 있는다. 가끔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을 때 형을 진정시키기만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더 이상의 간섭을 용납하지 못한다. 형은 자주 울었다. 형이 사랑하는 사람 때문이다.
“ 사귀는 거야? ” 우유를 붓던 손이 일순간 멈춘다. 눈알을 도르륵 굴리며 눈칠 보는 형이 웃겼다. 그 사람이랑 사귀는 거죠? 전에 말한 사람. 입을 빼죽 내밀며 고개를 끄덕인다. 내 눈치는 왜 보는 거야. 기분이 상해 시리얼만 푹푹 퍼먹었다. 형은 그 사람의 다정한 면이 좋댔는데 그 사람이랑 사귄 후로 자꾸 운다. 안 봐도 뻔하지, 똥차 새끼, 인력거 새끼. 형의 앞에서 대놓고 그를 까내릴 때면 또 입을 빼죽이다 그래도 괜찮은 형이야, 따위를 중얼대는데. 씨발 그놈의 그래도. 진짜, 존나 멍청해, 형의 지독한 사랑을 부서 버리고 싶어서 딱 죽을 맛이었다.
형은 형의 사랑 때문에 힘들어한다. 어쩐지 찝찝하고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기분이 더러웠다.
내가 형이 그 사람이랑 안 되게 해달라고 했지, 누가 울리라고 했나. 그 사람 말고, 나 좀 보게 해달라고 한 거였는데, 왜 흘러도 이딴 식으로 흘러가는지. 저주를 퍼부은 나로선 떳떳하지 못했다. 진짜 믿는 건 아니지만, 왠지 꺼림칙하다. 형은 사랑을 이루어 갈수록 죽어갔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보기 싫었다.
“ 그냥 헤어지면 안 돼요? ”
“ 무슨 소리야? ”
“ 형 힘들잖아요. ”
“ 아이, 정말 장난도 심하다. ”
우리 지성이. 뺨을 꼬집으려 달려드는 형을 억지로 떼어냈다.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지. 당연하지만 서러운 건 어쩔 수가 없다. 형한테 나는 그저 귀여운 동생 여럿 중 하나일 뿐이니까. 나는 아직도 형이 좋아서 죽어 가는 형을 보며 온 몸이 꺾여 가고 있는데. 마음이 툭 불거져 퉁명스런 말은 홧김에 나온다. 걔가 뭐라고 형이 울어요. 동그랗게 뜨인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다. 주절대는 주둥이를 잘라 버리고 싶다. 아 씨……, 저 갈게요. 외투를 집어 들고 괜히 으름장을 놨다. 기분이 팍 상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결국 몇 발자국 못 떼고 계단 구석에 앉아 코를 훌쩍였다. 정말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 붉은 게 입을 벌릴 때마다 뚝뚝 떨어진다.
나는 여전히 형을 사랑한다. 우리는 기구한 운명임이 틀림없다. 서로 눈앞에 있는 사랑을 잡지 못해 개처럼 그 주변을 기어 다니기만 한다. 나는 얼굴이 덥고, 숨이 막히고, 마치 감기에 걸린 것처럼 열병에 허덕였다. 형을 보면 씻은 듯이 나은 것 같다가도 금세 더 아팠다. 짝사랑이 그렇지 뭐. 알면서도 계속 좋아하는 건 내가 선택한 어쩔 수 없는 대가인데, 그럴 거면 좋은 사람이나 만나든가. 미련한 형이 한심하고 그런 형을 못 놓는 나는 더 한심하고, 죽기 좋은 날이다. 추락하기 좋은 절정이다.
그런데 형, 형은 내가 형 좋아하는 거 알고 있지?
모르는 척하는 것도 웃기잖아. 입에서 단내가 잔뜩 풍긴다. 내가 약을 했나, 왜 이렇게 어지럽고 기분이 좋지. 비실 새어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다. 발등이 굽어 간다. 우악스레 잡은 형의 턱을 쓸어냈다. 형은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이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지. 형을 꽉 안았는데 이젠 나보다 작은 등은 미동도 없다. 지성아. 형의 말은 명령이다. 나는 개이고. 못내 아쉬워 고개를 묻고 목을 죽 핥았다. 박지성. 나는 못내 아쉽지만 잠시 손을 풀고 형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눈알이 뜨거워 참을 수가 없다.
“ 잘 해왔잖아, 갑자기 왜 이럴까? ”
“ 형 미쳤어? ”
“ 나 더 이상 안 보고 싶은 건가? ”
아니지? 못된 말이 발을 묶었다. 내 사랑은 진짜 개 씨발이다. 형은 그 예쁜 얼굴로 내가 죽고 못 사는 웃음을 만개한다. 날 죽이려 하는 게 틀림없다. 비참해서 죽이려는 거지 나를. 절박하게 형의 손을 끌어다 입술을 묻었다. 날 사랑해주면 안 돼? 볼품없는 진심이 진심으로 받아지길 바란다. 지금껏 내가 한 말에 거짓은 없다. 형은 그 마저도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 난 그 사람 사랑해. 흔들림 없는 목소리는 나를 갉아내고 도려내고 찢어 낸다.
“ 형은……, 진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
“ 응, 지성아. ”
“ 형이 어떻게 이래. ”
“ 응, 지성아. ”
“ 내 꼴 다 봤으면서 좆같은 거 다 알면서 형이 어떻게 이래, 형이, 형은 나한테 못될 거면 형은 진짜, 좋은 사람 만나라고, 왜 날 자꾸 죽여, 왜 혼자서 힘들어 뒈지고 싶어 하는 거야, 나 엿 먹이려고 이래? 진짜 사랑해? 그 새끼는 형 안 사랑해, 형도 안 사랑하잖아, 내가 나는 형 사랑하는데 왜 그래, 왜 나는……. ”
“ 지성아, ”
네가 원했잖아. 일순 내 뒷머리를 쓰다듬던 손에 힘이 풀린다. 네가 원했잖아. 곧 형의 얼굴이 눅눅해진다. 난 이제 그 사람 아니면 죽어,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을 거 같아, 그런데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는 건 너 때문이잖아. 네가 그랬잖아. 콱 조이는 내 목은 숨구멍이 막혀서 아무 말도 내지 못한다. 형이 끈적하게 녹아간다. 잘못했어. 입 안이 막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잘못했어. 잘못……. 잡히지 않는 형을 억지로 붙들고 나는.
차라리 그 안에서 죽어가길 바란다. 형을 품고 형이 나를 품고 차근차근 죽어가길 바란다. 비로소 하나가 될 때 조용히 눈을 감고 더 이상 원망 같은 거 하지 않을게. 형의 평안 그 사랑 더 이상 바라지도 귀찮게 하지도 않을 테니 날 한 번만 달게 봐줬으면. 나를 안아줘. 내 손을 잡고, 그냥 도망가자, 어디든 힘들게 하지 않을 테니 날 믿고 제발 도망가자. 그럼 비로소 하나가 될 거야, 주변의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이 악몽에서 도망가자.
참으로 엉망진창인 사랑임에도 절절했고, 이렇게 깊은 열정은 없었지. 절실한 나는 기억을 죽이고 무섭도록 깊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길 바란다. 악몽을 벗어나 편안한 꿈으로 지그재그 걸으며 도망간다. 악몽보다 더 악몽인 삶이니 꿈에서 깨지 않길 바란다. 무색한 형이 죄 많은 내 목을 죄이는 상상을 하며 눈꺼풀을 감는다. 무엇이든 가능한 꿈은 내 안식처이다. 결국 죄 많은 나는 사랑을 외치며 에덴으로 도망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