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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사랑한 하늘

러셔

너여야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은 너여야지
너밖에 없으니까
네가 해야지

황정은- 계속해보겠습니다.

넌 나에게 큰 변화였다. 

사랑을 했다. 불안한 게 많았던 너였고 난 너의 그런 모습이 점차 없어지고 괜찮아지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고 될 거라 믿었다. 사실 이미 이뤘다고 생각했다. 너의 불안함과 우울함은 그랬다. 넌 그런 생각에 휩싸이면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아직 사랑하지만 넌 나보다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말. 이상하다.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만나 그 품에 안겨 행복해하는 모습이 너에게도 행복으로 다가올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해, 제노야. 나는 다른 사람한테 갈 수가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고 날 사랑하는 사람도 너야. 같은 말이 반복되고 결국 헤어짐은 없는 이야기가 됐다. 헤어질 수 없는 사람들의 뻔한 이야기로 되풀이되는 과정이 무한 도돌이표라도 찍힌 듯 반복되는 이야기가 시작을 찾을 수 없었다. 

언제부터 그랬던 걸까. 사실 잘 모르겠다는 말은 핑계에 불과할까. 그래도 모르겠다. 이 말을 제외하곤 나의 생각을 내뱉을 수 있는 단어가 없었다. 쌓아온 사랑의 탑이 무너진걸까? 그렇진 않았다. 처음 만남부터 친구에서 연애를 하고 우리가 만났던 많은 날들 속에 우리가 지나온 많은 추억과 장소 속에 무너짐은 없었다. 이제노는 나재민한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못한다. 나재민은 눈치가 빠르고 이제노는 그걸 가장 잘 알았다. 이제노는 나재민을 여전히 사랑하고 나재민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나재민도 이제노를 사랑한다. 뭐가... 어디서 잘못인걸까? 사실 잘못된 건 하나도 없을 걸. 태어날 때부터 우울하겠냐? 이동혁의 한 마디에 반박도 못 했다. 그러게... 이해를 해야 했다. 이유를 알고 싶지만 물을 수 없었고 이제노는 생각보다 튼튼했다. 다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웃으며 밥 먹자고 조르는 게 꼭 나재민 머리 속에서 아니 꿈이라도 꿨다는 듯이.

 


언제 또 우울함이 너에게 안겨 헤어지잔 말을 할까 몰랐지만 우울이 너에게 안기기 전까지 항상 달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서로에게 짧은 입맞춤, 간장계란밥을 해달라며 조르는 너를 위해 만든 아침. 서로의 아침을 위한 준비와 다정한 말들이 오가고 짧은 키스 후 각자의 직장으로 향했다. 

오늘도 먹구름이 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이따금 힘이 빠지는 너가 생각났다. 괜찮을까. 무슨 생각에 빠져 있을까. 가끔은 미리 준비를 하기도 했다. 헤어지자는 너의 말을 막을 방법. 넌 아직 나를 사랑했다. 그러나 자꾸 끝이 있다는 불안함에 서로의 마음이 더 깊어지기 전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똑똑하면 원래 복잡한거냐?

내가 뭘 알겠어. 내가 이제노처럼 똑똑한 것도 아니고. 술이나 마셔라. 

단순하긴.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넌 요즘 민형이 형이랑 잘 되어가고? 

야, 요리하느라 남아나질 않는다. 우리 형 맨날 노래 불러. 최근에 부르는 노래 뭔지 아냐? 먹고 싶은 음식으로 곡 써서 부르더라. 

 

주절주절 이동혁의 민형이 형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재밌었다. 둘이 어떻게 만난 건지 처음엔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더니 그새 눈이 맞았는지 했단다.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연애도 하고. 이동혁한테 들은 첫 섹스 이야기는 이제노와의 첫 섹스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그 때를 생각하느라 이동혁 말을 거의 절반은 안 들었다는 사실은 비밀이다.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을까, 오늘따라. 계속 흐르는 생각에 어쩌면 오늘은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빨리 집에 가서 안기고 싶었다. 못 본 시간이 얼마나 길다고 벌써 보고 싶은 지. 입꼬리가 귀에 걸린 것 같다는 말을 알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둘의 첫 만남은 지각한 나재민이 옆자리가 빈 이제노의 옆에 앉았을 때 시작했다. 창가 끝자리. 창문 옆에 앉고 싶다는 나재민의 말에 이제노는 자리도 바꿔줬다. 사실 그 땐 축구 구경을 위해 창문 옆에 앉고 싶었던 건 나재민이고 자리가 상관없던 건 이제노였다. 나재민은 바뀐 자리는 이제노랑 퍽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창가의 바람이 불어오면 조금씩 흔들리는 머리카락에 단정한 교복, 맑은 눈으로 수업에 집중하는 이제노를 보며 나재민은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노에게 처음 만난 나재민은 특별했다. 새 학년 첫 날, 간당간당하게 교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학생에 옆자리를 내줘야했다. 짝 없는 줄 알았는데... 더 웃긴 건 베시시 웃으면서 창가쪽 자리 좋아하는데 바꿔주면 안되냐고 물어보는 거다. 꽤 귀여웠다. 이건 나중에 이제노가 창가 옆자리를 가장 좋아하게 된 이유가 맞았다.

친해지고 여기저기 서로를 함께 아는 친구들은 늘어갔다. 무엇보다 함께 라는 게 좋았고 서로가 소중했다. 지겹도록 붙어 다녔다. 그러면서도 지겹다는 걸 느끼지 못 했다. 같이 있으면 있을수록 서로를 알면 알수록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의 마음을 알았고, 그 해 가을 연애를 시작했다. 첫 데이트, 첫 키스, 첫 섹스. 어느덧 연애 6년이라는 시간에 익숙해졌다. 


재민아, 너는 꼭 하늘 같아. 맑고 푸른 하늘. 
그럼 넌 구름이야? 우주?
아니, 구름. 
왜?
비밀이야.

고백을 받은 가을도, 그 다음 해의 가을에도. 아마 우리가 같이 하늘을 바라보는 날이면 항상 넌 나에게 맑은 하늘 같다고 그랬다.

 

고민 끝에 답을 찾았다.

맑고 푸른 하늘에 구름은 많았다. 구름 하나쯤 없어도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그런데 구름은 하늘이 아니면 어디에, 어디에 있는데?

구름은 그랬다. 어느 날엔 비를, 어느 날에 눈을, 어느 날엔 기분 좋게 예쁘기도 했다.
화창한 날이기도 했고, 찝찝하게 내리는 비도 동반할 때가 있었고, 구름은 참 감정 표현도 확실한 것 같았다. 아마 이제노는 구름 하나 없어도 멀쩡한 하늘 같을, 아무렇지 않을 나라고 생각 했을까. 참 이제노 같은 생각이다. 하늘이 뭐 맨날 맑을까. 하늘도 흐리고 맑고 그러는데. 실 없이 웃음이 터졌다. 이제노가 가장 좋아하는 나재민은 맑고 푸른 하늘 같나보다. 그러는 이제노는 나재민에게 가장 소중한 구름 같은 사람이다. 없으면 맑고 푸른 하늘도 어둡고 컴컴하게 만들 수 있는. 생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다. 

밤하늘을 계속 바라보다 제노한테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너의 우울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자기야~ 제노야. 계속 부르기만 하자 취했냐고 물으며 데리러 오겠다고 그랬다. 아직 안 취했는데 데리러 온다는 말에 벌써 기분이 좋았다. 멀리서 뛰어오는 너가 보인다. 같이 달렸다. 더 금방 가까워지기 위해서. 손을 맞잡고 한참을 걸었다. 가로등이 없는 곳을 찾아 계속 걸었다. 별만 보이는 밤하늘이 보이자 나란히 벤치에 앉았다. 

제노야, 너는 밤하늘 같아.
갑자기? 왜?

두 눈 똥그랗게 뜨고 물어보는 게 오늘따라 참 강아지 같았다. 

그냥, 너랑 잘 어울려서. 나는 별 할래. 가장 소중한 별. 어떤 별이든, 어울리는 밤하늘에서 가장 소중한 별.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이 맞닿았다. 한참 질척이는 소리만 나다가 입술을 떼고 곧이어 서로 눈을 마주치고 약속이라도 한 듯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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