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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랑

1. 

 

  그 버스는 인기가 없었다. 한 바퀴 돌고 지나치는 전자랜드 대리점 앞이 정거장 중 제일 번화가였다. 그마저도 뒤로 온 초록버스로만 정장 입고 교복 입고 머릴 볶거나 허리 굽은 사람들이 쏠렸다. 개중에서 파란색 명찰 단 이제노와 나만 노란색 버스 안 계단을 밟고 카드를 찍었다. 실밥 이음새 때문에 이름이 이재노 나재먼으로 보였다. 걔와 나는 세탁기를 돌릴 때마다 지붕이 휘청 기울어지는 세탁소에서 삼천 원씩 내밀고 박은 명찰을 보며 배 찢어지게 웃은 적 있다. 

  뱃가죽 우그러지게 가난하기도 했다. 이제노의 백팩은 옆집 삼수생 형이 자기 형한테 물려받은 걸 물려받은 거였고 내가 들고 다니는 건 신세계몰 쇼핑백이라 입학식날 쇼핑하러 온 애로 이름 꽤 날렸다. 버스는 학교 옆 전자랜드를 지나치고 육 층짜리 아파트를 지나치고 주택가를 넘겨서 쫄딱 망한 마트 앞에 정차했다. 내려서 그냥 골목으로 걷고, 또 걷고, 왼쪽 오른쪽으로 틀어서 팔 분쯤 걸으면 또다른 동네의 입구였다. 애들은 지들 맘대로 거길 소굴이라 이름 붙였다. 그래서 이제노와 나의 주소는 소굴시 소굴동 소굴단지 어쩌고저쩌고. 정식 명칭 같은 거 말해 봤자 어딘지 아는 애도 없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음을 초등학교 사학년 때 사회 시간 동네 지도 보면서 알았다. 계단 올라가다 구르는 우리집, 밤마다 벽지 뜯어가는 유령, 들끓는 벌레나 깨진 가로등, 지도 속 우리 동네의 부재를.

  그래서 난간 아래 번뜩이는 창문 너머 빛들이 운치 있고 문 열면 보이는 배배 꼬인 계단이 모던아트적이고 문 열면 맞은편이 남의 집인 편리함이 마음에 들어 여기 머문다 생각하면 굉장히 오산이었다. 저 빌딩 불빛은 남의 야근을 배터리 삼아서 이른 아침 해오름에 먹혔고 모던아트는 개뿔 그냥 길목이 좁아서 계단으로 발 딛다 구르는 게 예삿일이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내 집 문 열다 이제노가 마빡 맞는 건 무슨 콩트같은 상황이야. 암만 그래도 개중 제일 짜증 나는 건 짜장면 하나 시킨 다음 받으러 초입까지 나가야 하는 수고로움이었다. 모든 건 돈이 없어서였다.

...... 그래, 돈이 없어서.

 

2.

 

  동네 곧 망한다더라 하고 돈 게 십 년은 더 된 풍문이었다. 돈없는 동네 재개발을 하겠다며 인근 판잣집을 다 뒤엎어 버리더니 몇 달째 뼈대만 박아 넣는 게, 재개발이고 빌라 건설이고 뭐고간에 단체로 개꿀잼몰카라도 당한 줄 알았단다. 시멘트 냄새 하나로 미래를 꿈꾼다 말하던 치매 걸린 노인 하나가 집을 나가 공사장 시멘트통에 자기 머릴 빠뜨렸단 얘기를 들어본 적 있다. 저앞 가게 앞에서 정씨 아저씨와 석씨 아저씨가 장기판 뒤엎더니 언성 높여 씨발 년 나가 죽어라 형님이나 콱 대갈빡 맞고 뒤져 버려라 한다는 소문을 들은 적 있다거나. 파란색 눈동자를 끼운 누나가 지 애비한테 머리채 잡혀선 여기 사람 죽네 외친다는 얘길 들어본 적 있다. 실은 소문 아니라 내 귀로 직접 들었지. 소굴은 성악설의 증거물과 같다고 옆동네 성동교회 사이비 목사가 그랬다. 좆같게도 이제노와 나는 같은 날 버려져선 졸지에 성악설인지 어쩌고인지의 산증인이나 돼 버렸다.

  생일이 같은 것도 아니고 똑닮은 쌍둥이도 아니면서 왜 같은 날 버려졌냐 묻는다면 내가 낼 답은 울 엄마랑 쟤네 엄마랑 아는 사이였나 보지, 이것 하나였다. 실은 이것조차 추측이다. 그러나 억측일 리 없다. 나란히 놓인 과일바구니 모양새가 같았고 입힌 저고리나 둘둘 말린 작태나……. 애 둘 주워다 놓은 노파가 말하길 느 둘 생년 적은 글씨가 똑같드라고. 0423 이제노 0813 나재민 잘 키워 주세요 잘 키워 주세요. 단지 도약을 한 것뿐이다. 한 명인지 두 명인지 몰라도 그-혹은 그녀-(들)은 도망 아닌 새것으로의 도약을 했을 것만 같아서 닿을 데 없는 원망따윈 접은 게 오래전 일이었다.

  원망은 안 하지만 굴은 턱없이 비좁았다. 나는 몸을 불리지만 여긴 그대로라 때를 놓쳤다간 허리 구부러질 때까지 짓눌려 살아야만 하기에 더욱 조급해졌다. 허리 좀 펴고 살고 싶어서 미친듯이 돈 벌었다. 벌고 있고.

 

2-2.

 

  벌어 왔지. 정작 든 건 조미료 팍팍 쳐진 음식물일 뿐인데도 도시락폭탄이라도 든 마냥 소중히 품에 안고 이제노네 집 문을 열어젖히는 게 하루 끝물의 일이었다. 첫째, 걔네 집엔 레인지가 있고 둘째, 대문이 그나마 멀쩡해서 안 털리고 셋째, 입 무거운 이제노가 있으니까. 오늘 폐기는 제육이었다. 그애는 유독 그걸 좋아했다.

"맨날 이렇게 먹는데 체 안 하는 게 더 신기하다."

"조용히 해. 들키면 다 털려."

  제육이건 치즈오므라이스 어쩌고건 편의점 도시락은 이구역 사람들이 쉬이 못 먹는 특식이었다. 그마저도 폐기가 안 나면 못 먹었다. 카운터에서 억지로 입꼬리 올리고 웃고 있을 때 머리로는 그런 생각이나 했다. 제육만 남겨라. 그럼 귀신같이 제육 도시락을 들고 왔다. (개너무하네 진짜) 네, 계산해 드릴게요~ 어이구, 학생 인사성이 참 밝네 허허 어쩌고. 또 학교 앞 편의점이라 야간 뛰어도 술담배 사러 오는 학교 애들이 많았다. 무슨 깡으로 학교 근처에 오나 했는데 솔직히 안 주면 뚜까 팰 것 같아서 모르는 척 넘겼지. 초반엔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 들여보내더니 이젠 지들이 와서 반말 찍찍 쓴다. 한놈은 올 때마다 만원짜리를 천원 열 장으로 바꿔갔다. 빨간 뚜껑에 제육 도시락도 가져왔다. (개새끼들이 안주로 제육을 처먹어) 안녕히 가세요~ 그러고 나서야 술에 절여진 아재가 만들고 떠난 부침개를 치웠다. 다음번에 찾아온다면 갈아만든배 사이다를 선사하마. 기대하는 게 좋을 거야, 하하하 이런 생각하다 퇴근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대신 좆목가오충들이 제육을 안 골랐고 부침개메이커는 웬일로 부재했다. 운좋게 장기간 살아남은 제육을 레인지에 돌리고 꺼내고 젓가락으로 뒤졌더니, 짠, 바퀴 시체가 나왔습니다.

"재민아, 혹시 마술 배웠어?"

"닥쳐, 제노야…."

 나는 손을 떨었다. 어쩐지 오늘따라 고단백이더라니.

 

2-n.

 

  제노는 이제 더 우리집 대문에 이마를 박을 수 없다. 우리집 대문마저 뜯겼기 때문이다. 사라진 건 없었다. 그래도 뭔가 구려서 오는 길에 자물쇠를 세 개 샀다. 어차피 알바 끝내고 오니까 제노가 자물쇠 네 개나 줘서 쓸모없어졌지만 안 켠 지 몇 년 넘은 티비 아래 금고에 그것도 넣었다. 나중 가서 여기 제대로 뜰 때 요긴하게 써먹지 않을까 싶어서. 그애가 자기 집으로 살림 옮기랬지만 됐다 했다. 재민아 밥 먹자 바아압 계란 깨 줘 이거 쏟았어 하는 소리를 모닝콜 삼아 매일 아침마다 듣느니 차라리 강도한테 이거 가져가세요 하고 티브이 넘겨 주는 게 훨배 나았다.

 

3.

 

  정현욱 아저씨랑 석필규 아저씨가 기어코 피를 봤다. 필규 아저씨가 흩뿌린 코피는 구멍가게 앞 전기 나간 뿌요뿌요 모니터에까지 묻었다. 분명 담에 갚을게 담에 가져올게 하다 몇만까지 쌓인 외상으로 언성 높아졌을 게 뻔하다. 정씨 아저씨네 가게 물건도 다 밖에서 훔쳐온 거면서 낯짝이 판판했다. 잠귀 밝은 제노가 밤마다 잠을 못 자길래 작작 싸우라고 편의점 빵 몇 개 드렸더니 되려 토막 내서 불려 팔고 필규 아저씨랑 욕설 주고받는 건 여전했다.

  잠 설치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망한 공사판에 대고 십자드릴 다다다 쏘는 노가다꾼들에 한번, 창문 다다다 두들기는 우박에 또 한번, 정씨 아저씨 석씨 아저씨 쌈판에 또 한번. 지구가 아파요 하면서 얼룩덜룩 행성이 온도계 물고 있는 포스터가 또 과장은 아니었는지 봄여름에 그 좁은 골목에도 얼음 우박이 와다닥 쏟아졌다. 간헐적이었다. 것때문에 창문 깨먹은 가구가 꽤 됐지. 우리집 창문에도 청테이프 붙여 뒀다. 이제노는 신문지 미리 붙여 둬서 말짱했다. 회색 울고 있는 종이에 서울 아파트단지 새 준공식이 열렸다고 적혀 있었다. 머리 벗겨진 남자 여럿 사이에 정장 빼입은 여자 한 명이 언밸런스하게 끼어서 가위로 빨간색 천을 잘랐다. 아마 저놈들 중 하나지 않을까. 왼쪽에서 세 번째 사람 인상이 개중 심각하게 구려서 저 인간이 여기 개발 담당자였으면 좋겠네 했다. 어쨌거나 제노는 신문을 붙였고 나는 그걸 뒤집어 놓았고.

  용케도 잠에 들면 그날은 얼굴도 모르는 엄마라는 사람이 나왔다. 눈코입 있는 데만 뻥 뚫려선 물 쏟아지는 것처럼 와르르 달려오는 게 맨정신으로 봤으면 꽤 호러틱할 광경이었음에도 만나면 또 몽중에서 눈물 샜다. 일어나서 얼굴 훔치면 그냥 건조한 게 다였다. 수돗물로 목을 축였다. 쇠맛이 났다. 목구멍에서 오른 건지 수도꼭지 녹이 슨 건지 알 수 없었다. 구겨진 교복 셔츠를 꿰어 입으니 단추 하나가 뚝 떨어졌다. 조만간 바늘이나 진창 찔러 넣어야겠다고 생각하다 창문 너머로 본 건 빠진 단추 끼우려 하는 이제노였다. 학교로 걸어가는 내내 계단에서도 만지작 길목에서도 만지작 교문 앞에서까지 만지작거리길래 엄포 놓았다.

"자꾸 신경 쓰이게 그러면 확 다 뜯어 버린다, 안 고쳐 주고."

  그랬는데도 일부러 보라는 것처럼 단추를 쨍그랑 떨어뜨리길래 그 아래 것도 확 뽑아 버렸다. 삼 초만에 후회했다. 이거 내가 다는 거잖아.

 

4.

 

  그래, 우리 동네 개망했다. 지들이 뭐 어쩔 건데.

  뭘 어쨌냐면 소문이나 퍼뜨렸다. 그 동네에서 사람 죽이고 쉬쉬한다잖아라거나 이웃끼리 집 털고 다닌다거나 슈퍼 물건도 다 밖에서 주워온 걸로 채운다거나 남자끼리 자는 소리 들린다는 그런 것 있잖아 진짜 장난 아니다 거기. 어디서 그렇게 사실만 주워듣고 온 건지 띠껍고 같잖았다. 티 안 내고 맞장구만 치자니 심성이 배배 꼬여선 니새끼들이 이런 데 버려져 봐라 하려니까 제노가 외쳤다. 다음 시간 영어 A니까 자리에 앉아 있자. 그럼 또 나대는 편인 애가 고함을 질렀다. 야, 자리 앉아아아악. 나는 삼 대째 내려오는 교과서를 펼쳤다. 고대 유물 수준이었다. 필기는 안 하고 읽기만 했다. 솔직히 수업 시간에 자도 필기 베끼기 같은 건 안 해도 됐기에 행운은 행운이었다. 대신 뭐 하나 새로 적을 공간도 없었다. 

  특성화 와서 자격증도 미친듯이 땄다. 파워포인트, 한글, 워드, 엑셀로 시작해서 컴활 자격증 전산회계 자격 세무회계 자격증 이딴 것에 심지어 쓸모없는 포토샵까지 배워서 민증 사진 포토샵 기깔나게 해 주고 돈 꽤 걷었다. 이카운트 어쩌고 사만 원 회계관리- 하고 불러대는 씨엠송은 버스에서 가끔 나오면 내달팽이관을 뚫어 버리고 싶었다. 재개발 좆돼서 개망한 동네에서 벗어나려고 취업부터 생각하는 게 나한텐 당연했다. 소굴에 몇 년만 더 살았다간 장기판에 맞아 죽던 강도한테 장기 털려 죽던 내가 스트레스로 쓰러져 죽던 요절 엔딩을 맞이할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제노는? 걔는 뭘 해도 반만 갔다. 성적도 평타였고 교내 평판도 평타였고 좆질도 평타였다. 한마디로 밍숭맹숭했다. 잘난 거라곤 얼굴 하나라는 본인 피셜이 있었지만 터놓고 말하자면 노식이었다. 좆질은 어떻게 알았게. 바지 뒤집어 놓지 말라고 아랫도리 깐 채로 난리치다 물흐르듯이 친 대딸이 시발점이었다. 후로 몇 번씩 쳐 주다 걔 생일날 잤다. 아니, 딱 한번밖에 안 잤는데. 일단 정씨 석씨 둘이 섹스할 리가, 웩. 더러웠다. 그래서 하여튼

"미쳤다고 그딴 걸 소문내냐고, 이제노야."

"어.... 애들이 주변 살지 않냐고 물어보길래 어쩌다가."

  당연히 구라겠지. 거기 어떤 줄 아냐며 자발적으로 터놓았겠지. 그래서 지딴엔 접근자들 더 떨쳐냈다고 좋아했겠지. 궁금해서 찾아올 경우의 수는 생각도 않고 단순하게 굴어서 대가리가 울렸다. 어떻게든 이럴 때 나의 호적상 주소가 사랑스러워졌다. 등본에 뽀뽀라도 마구 퍼붓고 싶었다. 저쪽 동네 주택가 사는 걸로 알려진 내가 그 소문에 휘말릴 확률은 제로였다.

 

5.

 

  또 얼음 후드득. 간밤 제노가 뜯긴 대문 문턱을 넘고 두들겼다. 지구가 미쳤나 봐. 그러게 말이야. 그런 대화나 나누다 이불 한 장 더 펼쳤다. 아예 걔네 집 살림을 몇 개 옮겨다 뒀다. 분홍색 칫솔 하나 보라색 칫솔 하나. 나이 헛으로 처먹은 아저씨들이 또 지들끼리 언성 높이거나 우박 비 눈이 내리는 날엔 초록색 대문 열고 우리 집 문턱 통과해서 찾아왔다. 걔 나 열셋인가 됐을 무렵에 걔가 곽얼음을 얼려와 집 창문 앞에 쏟으며 우박 온다고 했던 적 있다. 나는 알면서 모른 척했다. 어쨌거나 볕 쨍쨍하고 공사판 난리 안 나고 가게 앞이 잠잠할 때 핑곗거리 삼기 만만한 게 그거였다.

  진짜 어이없는 게, 날 추우면 수도도 어는데 굳이 날 더울 때 물을 얼려서 남의 집 대문에 막 뿌리는 것이다. 저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깝다 이런 것보다 별것 없고 쟤도 앵간 자존심 빡세구나가 다였다. 그냥 오면 될 것이지 굳이 되도 않는 자연재해 흉내나 냈다. 레인지 돌리러 갔다가 냉동실에 얼음이 얼어 있으면 일부러 통을 뒤집어 엎었다. 미처 안 녹은 얼음물이 아래로 뭉텅이 져 흘렀다. 

  눈치 챘겠지만 이제노는 여기서 꽤 잘 살았다. 유일하게 집에 냉장고 있고 레인지 있고 장판도 있었다. 다 걔네 아빠 덕이었다. 정확히는 걔네 아빠라는 사람이.

 

5-2.

 

  그러니까 아주아주 맨처음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우리한테 마고할미나 다름 없는 늙은 할매가 나랑 제노를 주웠고, 당신 집에서 한 여섯 살까지 키우다가 제노 애아빠라는 사람이 정장 빼입고 와서 애 잘 지내냐고 물었다더라. 육 년 먹이고 재우고 입힌 정이 있지 혹여 아기 돌려달라 할까 싶어서 그런 애"들" 안 키운댔더니 그 집 대문 앞에 두 달 간격으로 레인지 들어오고 냉장고 들어오고 장판 들어오더니 그 다음 달에 할머니가 심장마비로 세상 뜨셨다. 워낙 어릴 때였어서 토막 난 기억이지만 그것에라도 의지하자니 우리 제노 잘 부탁합니다, 하고 쓰인 노란색 종이가 붙어 있었던 것 같지 싶다. 할머니가 박스를 뜯으면 나는 이제노를 쿵 쳤다. 으앙 하고 걔가 울면 혼났다. 그때마다 아닌 척 비죽비죽 웃었다. 요상한 데서 소속감을 느꼈다. 단지 피 섞인 가족은 동정 팔면 팔릴 만큼 지독하고, 그 여섯 달만큼은 나도 지독함에 엉켜들고 싶었을 뿐이었다.

 

6.

 

  면접에 다 떨어졌다. 편의점도 사람 끊어져서 망했다. 간판 내릴 때 쌤쳐둔 제육 도시락이 세 개였는데 그것마저 일주일 안으로 동났다. 그래서 라면을 끓였다. 건더기 안 넣고 물 적게 해서 대파도 썰고 기분 좋은 날엔 계란도 빠뜨렸다. 나는 아예 공부를 던졌고 이제노한테 올인 걸었다. 너 수능 잘 보면 그때 또 같이 자 주겠다 하는 파격적 공약도 걸었다. 별것도 아니면서 득달같이 달려들길래 뭐 어쩌겠나 싶었는데 모의고사 점수가 몇 배로 뛰더라. 솔직히 좀 놀랐다. 교사가 꿈이라던 재수생 형도 이제노 대학 보내기에 동조했다. 돈 버는 기계 돼서 몇 년만 모터 돌리다가 여유 생겨서 제노가 직장 얻으며 제대로 빌붙어먹기로 작정했다. 하루는 라면 먹다 말고 유리컵에 우유를 붓던 제노가 물었다.

"재민아, 나 너 없으면 어떻게 살지?"

"살지 마, 나 없이."

  오십 퍼 거짓 육십 퍼 진심, 도합 백십퍼의 내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길 간곡히 빌었다. 그러면서 교복 셔츠에 바늘을 끼웠다.

  요즘 또 옆집 재수생 형의 아는 누나의 삼촌한테 소개받아서 봉고차 타고 엑스트라 알바 뛰기도 했는데, 좋은 건 또 알아보는지 담당자 한 명이 명함 내밀면서 스타 되어 볼 생각 없냐 물길래

"부모님한테 여쭙고 연락 드릴게요." (집에 토끼같은 수험생이 기다려서요)

하고 말았다. 제노야, 연예인 해 볼 생각 없어? 하고 물어볼랬는데 요즘 돈벌이도 힘들다길래 생각 접었지. 노식이라 내 눈에만 그닥이었지 어디 나가면 잘 팔릴 얼굴이라 아쉽긴 했다. 하지만 누가 그랬잖아.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 우리에게 안전은 안정적으로 돈 버는 일. 돈 돈 돈 그놈의 돈, 씨발것.... 사랑한다, 진짜로. 좀 나한테도 와 주라.

 

7.

 

  하필 멀리 떨어진 학교 배정받아서 좀 불안하다 했는데 수능 치고 돌아왔더니 현욱 아저씨가 삼겹살 두 근 안겨 주셨다. 느이들 좋아하는 고기 좀 썰었지, 하면서 헛헛 웃는데 답잖게 눈물이 핑 돌았다. 오늘 제 생애 최고의 날이에요. 고개 한 여섯 번 쯤 숙이고 걔네 집 냉장고에 비닐 봉투와 함께 쑤셔 뒀다. 그런데 버너가 있었나? 저번에 버너 없어서 후라이팬에 어찌어찌 구워 먹긴 했는데, 하고 봤을 때 신발장 위에 웬 버너 같이 생긴 게 보이는 거야. 봤더니 새 가스까지 찬 버너였다. 국민연료 썬연료. 씨엠송이 뇌를 스칠 때 제노가 털레털레 계란 사 들고 들어왔다. 나는 물었다.

"너 너네 아빠랑 연락해?"

 

7-2.

 

  엄마아빠 나만 없어. 세상 너무 같잖고 좆같고 외로워서 이제노라도 붙들려 했더니 쟤도 아빠 있어. 역시 온도계나 물고 있는 개같은 지구에 버려진다는 건 너무 좆같은 일이었다.

 

8.

 

  성적표가 나왔다. 둘 다 이대로는 나가리였다. 그때 난 근거도 없으면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8-2.

 

  우리 여기 뜨자.

  난 싫어, 재민아.

  상상하지도 못했고 상상하기도 싫었던 대답이다. 하늘이 두쪽 났다.

 

9.

 

  진짜 개처럼 벌었다. 그 망한 공사판에서 벽돌도 나르고 잠 줄여가면서 편의점 앞 파라솔 치우고 성질 드러운 연예인 비위 맞춰가면서 지나가던 행인 2 역할 엑스트라도 맡고 감자탕집에서 셀프인 깍두기 직접 날라 주고 별의별짓 다 해서 벌었다. 그런데 그 돈 쏟아부을 데가 하루아침에 공중분해됐다. 왜?

  진짜 왜?

"...... 니네 아빠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럼 말을 해."

"미안."

  진짜 미치고 돌기 직전이었다. 여지껏 내가 그렇게 자본주의에 찌들어선 염병하는 것 다 지켜봐왔으면서 단칼에 거절하더니 이유 물어보니까 미안하댄다. 그냥 화가 났다. 싫다 하면 내가 쓰면 될 것인데도 화가 났다. 그래서 쏟았다. 이제노가 발치에 쏟던 가짜 우박 말고 내 진심을 걔 면전에 쏟았다.

"너 내가 씨유 알바 왜 뛰었는데. 니 데리고 나가려고 개처럼 벌었어. 야간 뛰다 코피 몇 번이나 쏟은 줄 알아? 요앞에 공사판 나갔다가 팔모가지 하나 날아갈 뻔했다고. 그런데 왜 그래. 나가는 게 뭐가 겁나. 도대체 뭐가, 씨발!"

"재민아."

"……."

"개가 오래 묶여 있으면, 줄을 풀어 줘도 멀리 도망 못 쳐. 그냥 줄 늘어졌던 거기까지가 걔 바운더리인 거야."

"……."

"여기까지가 내 자리야, 재민아."

  제노가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러니까 그 지긋지긋한 방구석으로 더 빨려들었다.

"제노야,"

"그 돈 네 거야. 너한테만 의지하면 호구로 전락할 것 같아서 그래. 너 나 귀찮아했잖아."

"아니, 그게 아니라,"

"나 계란 혼자 잘 깨. 단추도 달아. 걱정 안 해도 알아서 잘해. 네 앞이라 호구짓 좀 했어."

너 왜 그렇게 이기적이야. 이 지긋지긋한 데가 뭐 좋다고 못 나가. 나 숨 좀 쉬자. 여기 싫어. 난 너랑 나가고 싶어. 밤마다 형광등에 벌레 꼬이는 것도 나 사는 곳 쪽팔려서 매일 주소 속이는 것도 맛없는 분홍색 치약도 돈 있는데 못 나가는 너랑 내 처지도 다 좆같아. 가로등 불 들어오는 데로 가자. 마음 놓고 잘 수 있는 데로 가자. 가서 딸도 잡고 섹스도 하자. 나 돈 많아. 방 하나 얻을 수 있어. 우리 가족이잖아. 가족, 그래. 사랑하잖아. 너 나 없으면 잠 잘 못 자잖아. 뱉고 싶던 말들이 짓눌리고 응축되어 딱 한마디 나왔다.

"진짜 너무하다."

"다시 올 거잖아."

우리 둘이 미친 척 살아 보려 했잖아. 개새끼

 

10.

 

  새 방을 얻었다. 재수까진 무리였고 운 좋게 학교 선생님이 일할 만한 곳 꽂아 주셨다. 하루에 몇 번씩 몸 혹사시킬 때에 비해선 벌이도 쥐꼬리였지만 나는 소굴을 벗어났다는 것 하나에서 꽤나 큰 해방감을 느꼈다. 좁지 않은 도시로 이사해서는 혼자 빨간 뚜껑도 기울였다. 작년인지의 좆가오충들이 무슨 맛으로 마셨는진 모르겠고 사천 원 남짓한 안줏거리 하나 사서 자작했다.

  달다.

  그리고선 숨통이 꽉 막히는 것이었다. 나는 비좁은 화장실에서 먹은 걸 게워냈다. 편의점에서부터 눈에서 왈칵왈칵하던 게 이제서야 쏟아졌다. 그 망할 도시락이 여긴 너무나도 많아서, 억울해서 눈물 났다. 갈 줄 알면서 다시는 거기 발 못 들일 것 같아 답답해서 눈물 났다. 거짓말의 댓가인지 술이 미치도록 써서 눈물 났다. 이른 봄의 설익은 우박이 창문을 두들겼다. 머지않아 장마철이 올 것이다. 나는 신문지를 붙였다. 또다른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는 기사 옆 첨부된 사진엔 똑같은 자리배치의 어른들이 노끈을 자른다. 신문지를 뒤집었다. 빛조차 점멸된 그곳에서 그리워했다. 난방 들어오는 방바닥에 뻗어서는 얼굴 없는 엄마가 쏟아지는  꿈을 꿨다. 깨면 뺨이 젖어 있었다. 사 둔 생수를 입에 댔다가 전부 버려 버렸다.

 

10-2.

 

  왜 찾아가질 못했냐면. 그러니까.

  내가 다시 돌아가 빠져나오지 못할 것만 같아서. 비겁하게도 그게 두려웠지. 

  재민이 바보다 나재민이가 더 바보다 하던 다섯 살의 낙서와 재민이 여자 친구 짱 못생겼어 하던 열 살 무렵의 질투와 이제노 등신 단추도 못 끼워 하던 열일곱의 걱정 담긴 담벼락엔 어느새 살고 싶어한 우리만 존재했다.

'보고 싶어.'

  그 거리에선 어떤 구두도 발에 맞지 않았고 어떤 꿈도 몸에 맞지 않았다. 우리는 늘 그리워했으므로 그리움이 뭔지 몰랐다.

'나도.'

  어느샌가부터 그리움에 소홀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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